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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물감각 Mar 05. 2024

모든 독서는 출애굽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은밀한 생>그리고 세기의 사랑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은밀한 생>을 병원 입원 기간 동안 정독했습니다. 쉽지 않고 재미도 없고 지루하고 맥락을 놓치기 십상인 이 소설을 재독 하면서 전통적 장르 개념을 파괴한 끔찍한 이 소설의 매력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사랑이라는 담론을 통해 인간 근원의 비밀을 찾아 그 기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키냐르는 소설가 이전에 음악적 분위기의 집안에서 태어나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배운 연주자이면서 훗날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페스티벌'을 창단하고 조르디 사발과 함께 '콩세르 데나시옹'을 주제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실존주의ㆍ구조주의 철학을 공부한 철학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시나리오 원작자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책을 읽기는 불편하지만 죽어가면서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하다


파스칼 키냐르가 말한 이 구절을 병원 침상에서 읽으니  실감이 납니다. 그는 자주 사랑과 음악과 독서를 말합니다. 그는 책 읽다-음악 하다-사랑하다는 동의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변성기 시절 악기 연주를 사사하던 음악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음악과 사랑을 배우고 헤어짐을 경험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네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를 펼쳐놓으며 음악과 사랑 간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연주되어야 하는 것은 악보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영혼이 움켜쥐고 있던 힘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가 네미를 통해 깨달은 음악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음악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생을 가르쳤습니다. 사랑은 침묵해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고 잠들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 중에서 말하지 말 것을 네미에게서 배웁니다.


--독서는 출애굽이다.


촌철살인의 이 짧은 문장은 힘이 있습니다. 야곱 일가가 약 430년 동안의 애굽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의 인도로 노역의 땅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출발한 사건이 '출애굽'이지요. 즉 독서는 어둠에서 길을 잃었을 때 찬란한 빛을 보여줍니다. 독자님들 내가 책을 너무 많이 읽는다고 불평하지 말아요. 나는 아직도 빛이 필요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는 '사랑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한' 이 소설에서 독서와 음악 외에도 많은 개념들을 논증합니다. 쾌락, 욕망, 음경들, 매혹, 갈망, 노출(나체), 성교, 침묵,  결별 등등 그러나 결코 여느 소설처럼 달콤하거나 말랑말랑하거나 짜릿하게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철학처럼 논증하고 논거를 제시하고 귀결시킵니다. 이쯤 되면 소설책인지 철학책인지 헷갈립니다.


--사랑은 추억이 되기도 환영이 되기도 원치 않는다. 사랑은 여기 현존하는 유일한 육체일 따름이다.


--사랑이란 한 영혼을 그의 육체가 아닌 것 속에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뻔뻔스럽고 위선적이고 수다스럽고 선명하지 못한, 인간 사회에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동물적인 순수성이다.


--사랑의 고유한 경험이 결별에 있다.


--경탄을 자아내는 결별이 이 세계에서 가장 큰 기쁨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동의해야만 한다.


--포옹밖에는 우리가 여자를 붙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여자들은 자신을 열지만 우리는 여자들이 열어주는 그곳에 머무르지 못한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여자들의 성기로부터 내던져진다. 결별이라는 말이나 어머니라는 말은 같은 것이다.


--인간 존재의 그 원초적 이미지는  우리를 수태하게 될 장면(부모의 성교)인데 그 결과물이 될 우리는 그때 부재했었다. 이 공백은 우리의 꿈속에 환영으로 나타나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매혹을 느끼게 한다..


--성교가 진실을 만들지는 않지만 진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성의 차이는 나에게서 너로 서로 교환되지 않는다. 성의 차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순간의 차용일 뿐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랑했던) 그 여인은 언제나 타인이다.


--나의 욕망은 너의 욕망이 아니다. 성의 차이는, 이 세상의 모든 언어로도 어찌할 수 없는 완강한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개인적이고 반사회적인 관계를 이루지만 결혼은 사회와 협력하는 관계로서 곧 영토를 점령한 집단이고, 육체를 점령한 자의 언어라는 것입니다. 결혼에 비하면 사랑은 저항군이자 반역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보다 사랑을 우위에 둡니다. 사랑의 문제에 직면한 마녀 키르케에 의하면 내연관계가 사랑의 이상입니다. 그리고 수녀 엘로이즈의 입을 통해 '나는 아내라는 단어보다 정부(meretrix)라는 단어를 더 좋아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작가는 불편하지만 독립적이고 복잡하지만 은밀한 삶을 더 좋아했습니다. 철저히 비밀에 숨겨둘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은밀한 생'입니다.


남자들의 성교에 대한 집착은 그때 부모로 인해 수태될 때 그 현장에 없었다는 결핍으로 인한 본능적 욕망이라는 것이지요.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기필코 찾아가듯이 ᆢ


그러니까 남녀는 결합에 의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녀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고 교환될 수도 없는 성의 차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사랑은 필히 결별을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렵습니다.  


--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육체에 자신을 열고서 그 육체에 닿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성의 운명을 넘어서는 일이며, 개인적이고 불가피할 따름인 자신의 죽음 자체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반사회적이고 반역자인 사랑에 거리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을 해체시킵니다. 그래서 사랑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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