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일주일에 한 번 의식처럼 금식을 했다.
"제정신이야? 요즘 잠도 잘 못 자면서 음식까지 안 먹는다고?"
"응. 일주일 중 하루는 나를 비워."
"너의 몸이 열 개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대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난 요즘 후회하고 있어. 뭐든 도전하는 네가 너무 보기 좋지만 내가 바란 건 건강까지 해치는 삶은 아니었어. 모든 도전에 태클을 걸어야 하나 생각 중이고 깊게 판단하고 행동해. 너 저번에 쓰러진 거 기억나지? 정신 차려."
매서운 그의 말에는 오뉴월의 한이 서려 있다.
베란다에서 내리쬐는 분노의 눈빛에 얼굴이 따갑다.
"알았어. 잠은 내 스스로도 제어가 안돼. 약을 먹어야 겨우 잠드는 걸 어떡해. 새벽에는 자동으로 눈이 떠져. 금식은 안 할게."
"정말이지 너는 일반적이지 않아. 네가 벌써 공지영이라도 됐어?"
"거기서 공지영 작가님이 왜 튀어나와."
"글 쓰는 것도 숨쉬기 위해 시작해 놓고 지금 봐봐. 또 욕심이 붙여서 너를 학대하고 있잖아. 대체 뭐가 그렇게 자꾸 하고 싶니? 뭐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좀 버려."
"그게 쉬웠으면 내가 이러고 있어?"
"내 충고 무시하지 마. 나 정말 화났어."
다시 시선이 내리쬔다.
말에 사방팔방 가시가 돋아 찌르는데 저항조차 할 수 없다.
그는 늘 옳은 말을 했고 나를 위한 말만 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제 친한 동생을 만났는데 그와 참 많이 닮았다.
동생도 한차례 훈육을 하고 갔다.
"언니! 내가 일부러 밤에 답장 안 하는 거 알아요?
답장하면 또 이어져서 못 잘 거 뻔해서 좀 자라고 답 않는 거예요. 몸 좀 챙겨요. 정말이지 걱정돼."
그와 짰는지 둘의 입에서는 늘 같은 말이 나온다.
웃긴 건 둘이 안 친하다.
내가 유일하게 허점을 보이고 내게 유일하게 훈육을 해주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을 진심 혹은 사랑이라 일컫는다.
훈육의 결과 금식은 기도가 끝나기 전까지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또한 굉장한 고집불통이라 스스로도 꺾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인생에서 신념이 생기고 기로에 서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보니 고집이 더욱 견고해진다.
기도 전 금식은 단순히 먹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육을 비워야 비로소 보이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다.
육은 신체다. 신체를 가벼이 하고 질문의 시간을 갖는다.
돌아본다. 반성한다. 그리고 균형을 찾는다.
내가 석가모니는 될 수 없겠지만 석가모니 코스프레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석가모니의 금식은 깨달음을 위한 과정의 일부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계를 깨달았다.
고통 자체가 곧 깨달음은 아니며 결핍은 오히려 집착의 또 다른 형태임을 발견했다.
깨달음 이후 금식을 중단하고 중도를 확립한다.
무수히 배웠던 불교의 핵심이다.
중도 즉 균형.
나의 기도 전 단식 또한 균형을 추구한다.
쉬지 않고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멈추지 않는 갈증을 위해 비운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허기는 복통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감각은 점점 무뎌지고 경지에 이르면 아주 작은 깃털의 가벼움을 느끼게 된다.
육은 그러하다. 영은 어떨 것 같은가?
영은 이러하다. 절제를 배운다.
무엇이든 멈추고 침묵의 묵상을 받아들인다.
묵상의 시간만큼은 욕구에 브레이크를 건다.
이 제동장치는 나를 고찰하는 힘이다.
묵상은 나를 정리 정돈하는 의식이다.
묵상 후 먹는 음식은 돌이어도 꿀맛일 것 같다.
투정 없이 무엇이든 맛있음을 느끼는 소소한 일상의 조각에 감사를 표한다.
비움과 성찰.
그리고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로 인한 깨달음.
이것이 내가 엮어내는 중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