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면서 숭유억불과 함께 숭농억상 정책을 펼쳤습니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야라는 기본 경제정책으로 상업을 천시하고 범법시하는 일까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팔아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재산을 빼앗는 도둑과 다르지 않다고 상인을 천시하였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보는 육의전을 조선 초기의 왕들이 봤다면 과연 어떤 표정이었을까요? 어찌 이런 일이~~
우리 선조들은 물물교환, 자급자족 등의 방법으로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궁궐이나 관청에서는 세금으로 특산물을 걷어서 사용하였는데 그에따른 불편함과 폐해때문에 궁궐근처에 시전을 두게 되었고 활성화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상업이 발전하게 됩니다. 시전 중 대표적 시전이 육의전입니다.
운종가에는 늘 사람과 물화가 구름처럼 모입니다. 시전은 나라의 혜택을 받은 상점으로서 한 가지 물품에 대해서 독점판매의 권리를 지닙니다. 그리고 난전이라는 국가의 허락받지 않은 시전에 대하여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이라는 권리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난전의 단속권을 남발하고 난전상인들에게 행패까지 부리자 정조 때 좌의정 채제공은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합니다. 이 일을 신해년에 시전과 난전을 통하게 했다하여 신해통공이라고하지요. 시전 상인들의 반발도 거셌지만 채제공은 ''온 나라의 백성은 똑같은 군주의 자식이다''라는 말로 국왕과 시전 상인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육의전은 서울 시전의 핵심으로서 규모가 제일 크고 국역도 가장 많이 부담했습니다.운종가를 따라 시전 행랑이 쭉 이어져 있는데 긴 직사각형으로 생긴 공간을 방이라고 합니다. 선전은 중국비단을 파는 전인데 1방에서 7방까지 있습니다. 한 방은 10칸으로 되어 있고, 한 칸마다 시전 상인이 1명씩 있었으니 선전 상인만해도 70명쯤 되네요.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전의 문 바로 앞에는 퇴청이라는 작은 방이 있고, 퇴청 상인은 손님을 기다립니다. 가게가 좁기 때문에 진열해 놓은 것보다 창고에 보관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손님이 나타났을 때 누군가 나타나 흥정을 붙입니다. 거래가 성사되도록 도와주는 여리꾼입니다. 여리꾼은 시전상인과 일종의 암호인 변어로 얘기합니다. 여리꾼은 시전 상인의 부른 가격에서 자신의 몫과 시전 상인의 이문을 더해서 값을 정합니다.
이제 육의전에서 사람들을 만나볼까요? 운종가를 오가는 사람중에 양반가의 여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노비에게 대신 시키기 때문이지요.저기 전기수가 있군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책을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읽어 주고 대가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이죠. 여리꾼,전기수,글월비자 등 현대에는 없는 직업들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글월비자는 무슨 일을 하냐구요? 퀴즈로 남겨 놓겠습니다.~~그러면 육의전에서는 어떻게 물건을 살 수 있었을까요? 네.화폐로 드디어 물건을 사게 되었습니다.지금의 당연한 일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정착된 것들입니다.숙종 때 발행한 엽전 상평통보가 보편화 되면서 더욱 상업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농정책에서 상업의 발달을 이룰 수 있었고 조선의 육의전,시전을 통한 상인들의 부의 축적은 조선 후기 신분에 의한 질서를 파괴하고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