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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숙 Aug 24. 2021

           화분과 집에 대한 단상

                                                                     권혜숙




  집 베란다에 꽃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더니 어느 사이엔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화분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느 것은 크고  넓고 깨끗한 것에 담겨 당당하고 우아하게 자리 잡고 버티고 있고, 어느 것은 사온 그대로 작은 포트에 담겨   사이에 끼여 웅크리고 있고 각양각색이다. 입장을 바꿔 꽃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뭔지 모르지만 억울하기도,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만큼 뭔가 기준이 일률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 꽃의 아름다움으로 삶의 호사를 누리는 나로서는 늘 마음 한편 부담감과 의무감으로 불편함이 따른다. 그래서 늘 벼르던 마음을 언젠가는 실행으로 옮겨본다. 작은 화분에서 몸을 웅크리며 버텨보던 아이는 자기에게 맞는 옷을 만나면 기지개를 활짝 켜고 다리를 쫙 벌리며 무서운 기세로 수형을 키우고 잎을 늘리기도 하며 빠르게 성장한다.  나의 게으름으로 고생을 시켰다는 자책감과 안도감이 밀려오는 순간이 된다.


  요즘 언론에서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중 가장 피부에 닿는 이야기는 집값  상승에 대한 것이다.  집을 장만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절실한 문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주거 마련의 부담은 있어 왔던 것이지만  불가능하게 느껴 포기하게 만드는 높은 집값에 대한 부담감은 근래 가장 높은 것이 사실이다. 자기의 안식처로 여겨지는 집이 마련되지 않을 때 정서적인 안정감도 얻기 어렵고, 다른 것에 대한 투자나 계획을 포기한 채 집 마련하는 일에 모든 힘과 노력을 바쳐야 될 것이다. 집을 마련해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고 하는 일이 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일도 뿌리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꽃을 키우면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 화분에 담긴 채 자신의 아름다움도 드러내지  못하는 꽃들을 보면서 내가 좀 더 부지런하고,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는 반성도 해보곤  한다. 구석에서 누구도 봐주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채 곱디고운 꽃을 피운 모습을 겨우 발견했을 때 그 꽃의 원망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도, 그 누구도 그런 환경에 처해지는 것은 불운일 것이다. 누구라도 다 보이는 곳에서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그것을 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람과 꽃이 닮아 있다. 꽃도 사람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신의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는.




  의식주는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지만 식물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다. 주거의 개념으로 화분은 꽃들에게 절대적 존재인 것이다.  물, 햇빛과  같은  생명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커야 하고 남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 자신에게 맞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너무 큰 것일 때 오히려 과습이 되어 죽을 수도 있다.  크기로만 판단할 수도,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도 안 되는 집과 화분인 것이다.




  끝도 모르게 오르는 집값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해지는 요즘, 집의 크기와 같은 외연으로 평가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꽃들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나도 한 번 돌아본다. 과연 나에게 맞는 집에서 나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그리고 그 누군가도 나를 위한 집을 주려고 마음 쓰고 있다는 것에 오늘도 무한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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