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한 번, 대한민국이 가장 거대한 질문과 마주하는 시간
매년 11월, 늦가을의 찬 바람과 함께 대한민국은 거대한 의식(儀式)을 치른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수십만 명의 청춘들이 자신의 12년 노력을 단 하루, 몇 시간의 시험에 쏟아붓는다. 이 시험의 무게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비행기도 이착륙을 멈추고, 경찰차와 구급차가 수험생 수송 작전을 펼치며, 전 국민이 숨죽여 그들의 건투를 빈다. 우리 사회에서 수능만큼 온 나라를 한 가지 목표로 결집시키는 이벤트는 드물다.
수능은 1994학년도에 처음 도입된 이래, 단순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를 대체하여 대학 수학에 필요한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로 시작되었다. 이를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출제 전문가 집단이다. 이들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수개월 동안 피를 말리는 출제 과정을 거친다.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문항들은 단순히 학생들을 줄 세우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과 사유 능력의 최전선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가장 정제되고 치밀하게 직조된 텍스트의 정수(精髓)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귀중한 텍스트들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을까? 시험이 끝나면 뉴스는 온통 난이도 분석, 등급컷 예측, 그리고 만점자 인터뷰로 도배된다. "올해 국어가 불수능이었네", "수학 몇 번 문제가 킬러였네" 같은 가십성 이야기들이 술자리 안줏거리로 잠시 오르내리다, 이내 대학 입시라는 현실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토록 공들여 만든 제시문과 문제 속에 담긴 깊은 사유의 세계는 채 펼쳐지기도 전에 잊히고 만다.
나는 가끔 프랑스의 대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의 풍경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시험 당일, 철학 문제가 공개되면 온 프랑스 사회가 들썩인다. "권력은 정의로울 수 있는가?",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와 같은 묵직한 질문들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카페와 술자리에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 주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 시험이 단순히 학생들만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사유하는 거대한 지적 축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수능도 그럴 수 없을까? 평가원이 공들여 출제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밀하고 논리적인 이 텍스트들을 단순히 문제 풀이용으로 소모하고 버리기엔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수험생을 괴롭히는 '킬러 문항'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지적 근육을 단련시키는 '생각의 숫돌'로 삼아볼 수는 없을까? 가십으로 가득 찬 대화 대신, 수능이 던진 묵직한 질문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함께 토론해 보는 문화를 꿈꾸는 것은 과연 무리일까?
이 연재는 그런 아쉬움과 희망에서 출발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혹독한 텍스트인 수능 제시문, 그중에서도 수험생들을 가장 깊은 절망에 빠뜨렸던 철학 제시문들을 우리의 삶 속으로 다시 불러내려 한다.
그 시작은 유독 철학적 함의가 깊었던 2026학년도 수능의 '칸트 3부작'이 될 것이다. 국어, 영어, 윤리 영역을 가로지르며 우리에게 '나', '우리', 그리고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칸트의 사유를 윤리 교사의 시선으로 해부할 것이다. 이어서 수험생들의 영원한 난적이었던 헤겔, 비트겐슈타인 등 역대 수능을 뒤흔든 사유의 거장들을 차례로 만날 예정이다.
이는 단순히 수능 문제를 잘 풀기 위한 해설서가 아니다. 암기의 시대를 넘어 사유의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가장 치열하고도 명쾌한 철학 트레이닝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시험지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 안에 숨겨진 사유의 보물지도를 펼쳐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질문과 마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