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수능, 왜 칸트인가? - 암기를 넘어 사유로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막을 내렸다. 현장의 교사로서, 그리고 철학을 전공한 사람로서 이번 수능은 유독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국어, 영어, 그리고 사회탐구(윤리) 영역을 가로지르며 임마누엘 칸트(I. Kant)가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소재의 중복이나 우연의 일치로 치부할 수 없다. 출제진은 ‘칸트’라는 거대한 지적 산맥을 통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에게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선 근본적인 철학적 사유와 고도의 사고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수능에 나타난 칸트를 철학적, 교육적 시각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번 시험은 칸트 철학을 관통하는 현대적 주체의 3부작(사실, 보통 칸트 3대 비판서 혹은 3부작이라 불리는 것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의미한다.)을 완성해 보였다. 출제진은 국어, 영어, 윤리라는 각기 다른 과목을 통해 ‘나’에서 시작해 ‘우리’를 거쳐 ‘정의’로 나아가는 거대한 사유의 지도를 그려냈다.
첫 번째 축인 국어 영역(독서)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을 던졌다. 칸트와 스트로슨, 롱게네스로 이어지는 인격의 통시적 동일성 논쟁은 윤리적 책임의 주체인 자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파고들었다. 칸트가 영혼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라는 인식의 조건으로 해체하고, 후대 철학자들이 이를 구체적인 신체로 재정립하는 과정은 학생들에게 ‘나’라는 존재의 근거를 묻는 가장 기초적인 철학 수업이었다.
두 번째 축인 영어 영역은 “‘우리’는 어떻게 공존하는가?”라는 정치철학적 난제를 다루었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다룬 지문은 인간을 천사가 아닌 악마의 민족으로 전제하면서도, 이성적 법치를 통해 자유와 평화가 가능함을 역설했다. 이는 법을 단순한 구속이 아니라 나의 이성적 자유를 실현하는 유일한 토대로 바라보는, 자유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성숙한 법 의식을 요구한 것이다.
세 번째 축인 윤리 영역은 “‘죄’는 어떻게 다루는가?”라는 법철학의 궁극적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사회적 유용성을 배격하고 오직 정의의 실현을 위해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칸트의 응보주의는, 사형조차도 범죄자의 인격적 존엄성을 역설적으로 존중하는 방식임을 보여주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감상적인 휴머니즘을 넘어, 엄격하고 냉철한 인간 존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묻는 스트레스 테스트와도 같았다.
결국 이번 수능은 학생들에게 이성적 주체로서 ‘나’의 인식론적 근거를 밝히고, ‘우리’의 정치적 공존 원칙을 수립하며, 그 원칙을 어겼을 때의 법적 ‘책임’을 감당하라는 하나의 완결된 철학적 커리큘럼을 제시한 셈이다.
이러한 출제 경향이 던지는 교육적 메시지 또한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암기 교육의 종말과 고등 사고 능력의 회복이다.
이번 시험에서 “칸트=정언명령, 선의지”라는 키워드 암기에만 의존했던 학생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국어 지문은 칸트의 인식을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스트로슨과 롱게네스의 논증 구조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논리적 지도 그리기 능력을 요구했다. 이는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텍스트 안에서 충돌하는 주장들의 관계(반박, 수정, 종합)를 파악하는 고차원적인 문해력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또한, 과목의 칸막이를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다. 국어에서 읽은 인격의 동일성이 윤리의 책임 문제로, 영어의 법치주의가 윤리의 정의론으로 연결됨을 간파한 학생만이 이 거대한 주제를 온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더 큰 교육적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 치르게 될 대입부터는 서술·논술형 문항 도입이 적극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이번 2026학년도 수능에서 칸트를 통해 요구한 고도의 논리적 독해력과 비판적 사고력은, 결국 다가올 ‘쓰는 수능’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강력한 전초전(前哨戰) 성격을 띤다. 주어진 텍스트의 논리 구조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할 수 없다면, 객관식 선지를 고르는 것을 넘어 스스로 논증을 펼쳐야 하는 미래형 평가 앞에서 학생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2026학년도 수능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교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요약된 개념의 암기인가, 아니면 원리와 논증을 붙들고 씨름하는 사유의 힘인가? 칸트가 쏘아 올린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이제 학교 현장은 ‘정답을 찾는 기술’이 아닌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성하는 힘을 가르치는 곳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번 수능이 던진 화두가 반갑고도 무겁다. 이제 다시, 사유(思惟)의 시간이다.
2026학년도 수능 국어 속 칸트 제시문과 본격 설명은 다음 글 <칸트가 칸트했다? (2)>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