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수능 국어 - 칸트(인격의 동일성 논쟁) 제시문
철학에서 특정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인격’, 그중 ‘나’를 ‘자아’라고 한다. 인격의 동일성은 모든 생각의 기반이다. 우리는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와 동일한 인격이기에 과거에 내가 한 약속을 현재의 내가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다. 칸트 이전까지 인격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유력한 견해는, ‘생각하는 나’인 영혼이 단일한 주관으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 지속한다는 것이었다. ‘주관’은 인식의 주체를 가리키며, ‘인식’은 ‘앎’을 말한다.
그러나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 즉 ‘자기의식’은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한 조건 자체는 무언가가 실재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기의식은 ‘생각하는 나’가 단일한 주관으로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 즉 ‘영혼의 실재함’을 보장하지 않고, ‘영혼이 실재할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칸트는 영혼이 인격이라는 견해를 반박한다. 칸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의 동일성을 의식하는 것은 인격이다.’와 ‘영혼이 자기의식을 한다.’라는 두 전제 모두 납득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 전제들로부터 ‘영혼이 인격이다.’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전제에 등장하는 ‘의식’은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해 의식한다는 뜻이지만, ‘생각하는 나는 생각한다.’와 다름없는 두 번째 전제에 등장하는 ‘의식’은 무언가가 꼭 실재함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칸트는 통시적으로 동일한 인격의 존재를 직접 증명하는 대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주치는 복수의 주관이 동일한 인격으로 인식된다.’라는 가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래야 경험적 판단, 윤리적 판단 등의 생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데, 이러한 구성은 통시적으로 동일한 인격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스트로슨은 자아를 인식하는 방식이 경험적 인식의 방식과 구별된다는 칸트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복수의 주관이 동일한 인격으로 인식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철학적 상상에 불과하다고 칸트를 비판한다. 인격의 문제에서 신체를 간과한 칸트와 달리, 스트로슨은 인격을 의식과 신체의 복합체로 본다. 스트로슨에 따르면, 시공간적 세계 안에서 우리의 신체를 매개로 대상이 경험된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며 자아에 대한 인식은 경험적 인식들로부터 추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공간적 세계에서의 경험이 인격의 통시적 동일성을 뒷받침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기의식도 마찬가지로 경험에 의존하기에, 자기의식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칸트의 견해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롱게네스는 통시적으로 동일한 자아가 없이는 경험적 인식이 성립할 수조차 없으므로, 자아에 대한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그는 자아와 인격이 시공간적 세계를 경험하는 인간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롱게네스는 인간은 도덕적 존재이며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율성을 지닌 존재라는 칸트의 견해를 인정한다. 그러나 자율성을 지닌다는 것은 시공간적 세계를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것들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려면 신체가 있고 살아 있어야 하므로, 인격의 동일성의 기준은 각자가 자신의 것이라고 통시적으로 인식하는 신체라고 롱게네스는 주장한다.
윤리 교과서에서 우리는 칸트를 주로 ‘정언명령’이나 ‘선의지’를 강조한 엄격한 도덕 철학자로만 만난다. 하지만 이번 수능 국어 지문은 칸트 윤리학의 뿌리가 되는 깊은 ‘인식론’적 질문을 던졌다.
도덕적 행동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해결되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그 행동을 하는 주체인 ‘나’가 누구인지 확립하는 것이다. 1년 전 친구에게 “밥 살게”라고 약속한 ‘그때의 나’와, 오늘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지금의 나’가 같은 존재여야만 비로소 ‘책임’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몸의 세포가 다 바뀌고 생각도 변했는데, 나는 왜 여전히 ‘나’일까? 철학에서는 이를 ‘인격의 통시적(시간을 관통하는) 동일성’ 문제라고 부른다. 이 난제에 대해 칸트와 후대 철학자들이 펼친 흥미로운 논쟁을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통해 풀어본다.
(※ 주의: 이하의 비유들은 난해한 철학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일 뿐, 인간의 정신을 기계적 장치와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1. 칸트 - 영혼이라는 '알맹이'가 아니라 경험을 묶어주는 ‘OS(운영체제)’
칸트 이전의 많은 철학자(데카르트 등)는 우리 몸속에 변하지 않는 단일한 실체인 ‘영혼’이 있어서 내가 나로 유지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칸트는 냉철했다. 그는 우리가 ‘책상’이나 ‘사과’를 눈으로 보듯 ‘영혼’ 자체를 관찰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대신 칸트는 ‘자기의식’(초월론적 주관)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를 스마트폰의 ‘운영체제(OS)’에 비유해 보자.
여러분의 스마트폰에는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게임 등 수많은 앱(경험의 파편들)이 깔려 있다. 이 다양한 앱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폰에서 ‘나의 앱’으로 실행되려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을 구동시키는 iOS나 안드로이드 같은 OS가 바탕에 필수적으로 깔려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면서 겪는 “어제 영화를 본 경험”, “오늘 떡볶이를 먹은 경험”들이 흩어지지 않고 “모두 나의 경험”으로 하나로 묶이려면, 그 바탕에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나는 생각한다(I think)’라는 의식의 틀(OS)이 있어야 한다.
칸트에게 ‘나’는 증명할 수 있는 영혼 알맹이가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OS)이다. 칸트는 우리가 시간이 흘러도 동일한 인격임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순 없지만, 우리가 경험을 하고 윤리적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드시 요청(가정)되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과 윤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2. 스트로슨 - 추상적 OS는 가라, 변해온 ‘신체’가 증거다
현대 철학자 스트로슨은 칸트의 생각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칸트가 말한 ‘가정된 자아(보이지 않는 OS)’만으로는 구체적인 인격의 동일성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트로슨은 칸트가 간과한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러분 방 벽에 어릴 적부터 키를 잰 자국이 남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 10살 때의 나, 15살 때의 나, 그리고 그 자국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 이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여 존재하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의 신체’다. 5년 전 일기장을 지금 ‘내 손’으로 만지고 ‘내 눈’으로 읽는 구체적인 신체적 경험이 이어져 오기에 나는 나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한다.
칸트가 “OS(보이지 않는 주관)가 있어야 앱(경험)이 돌아간다”고 했다면, 스트로슨은 “앱(구체적인 신체적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OS(자아)라는 인식이 생긴다”고 본 것이다. 그에게 인격의 동일성은 추상적 가정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서 이 몸을 가지고 살아온 ‘경험적 사실’이다.
3. 롱게네스 - 칸트의 ‘AI 시스템’과 스트로슨의 ‘자동차’가 만나 자율주행을 시작하다
롱게네스는 칸트와 스트로슨의 논쟁을 종합하여 더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녀는 칸트의 ‘자아(주체성)’ 개념과 스트로슨의 ‘신체(구체성)’ 개념, 그리고 칸트 윤리학의 핵심인 ‘자율성’을 하나로 묶는다. 이를 앞선 비유들과 연결하여 ‘자율주행 자동차’에 비유해 볼 수 있다.
먼저, 자동차가 스스로 움직이려면 핵심적인 ‘자율주행 AI 시스템(소프트웨어)’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자동차는 그냥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는 칸트의 ‘OS(초월론적 주관)’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 AI 시스템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AI가 실제로 도로를 달리고 경험하려면, 엔진과 바퀴가 달린 물리적인 ‘자동차 차체(하드웨어)’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점에서는 구체적인 물리적 실체를 강조한 스트로슨의 ‘신체’가 필수적이다.
롱게네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격의 핵심은 단순히 AI와 차체가 결합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이 결합하여 실제 도로 상황(시공간)을 인지하고 "멈출 것인가, 가속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자율성)’하며 주행한다는 데 있다. 즉, 롱게네스에게 인격이란 ‘자신이 통제하는 신체(자동차)’를 가지고 시공간 속에서 자율적인 삶의 경로를 선택하고 주행하는 존재다.
4. 결론 - 윤리적 주체로서의 ‘나’
이 복잡한 철학 논쟁은 단순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지적 호기심을 넘어서는 중요한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
칸트에게 우리는 경험의 주인이자 도덕 법칙의 입법자이다. 스트로슨에게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궤적을 가진 실재하는 존재이다. 롱게네스에게 우리는 신체를 통해 세상과 부딪치며 스스로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이다.
결국 우리가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변해버리는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과거의 약속과 현재의 실천을 ‘나의 자율적 선택’으로 통합해 나가는 존엄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칸트의 인식론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윤리적 메시지이다.
5. 잠깐! 하나 더! - 수능 제시문이 쳐놓은 오해의 덫 피하기
앞서 스마트폰 OS와 자율주행차 이야기를 통해 이 난해한 철학적 논쟁의 맥락을 짚어보았다. 이 비유를 머릿속에 담고 실제 수능 지문을 다시 읽어보면, 어딘가 설명이 충분하지 않거나 뉘앙스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는 수능이라는 시험이 제한된 시간 안에 정답과 오답을 명확히 나눠야 하기에, 철학자들의 깊고 입체적인 사상을 납작하게 눌러 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마치 입체적인 지구본을 평평한 지도로 펼치면 대륙의 모양이 조금씩 왜곡되는 것과 같다. 수능 지문이 은근슬쩍 단순화해버린 철학의 모습을 앞선 비유와 연결해 바로잡아 본다.
첫째, 칸트의 OS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필수적인 생존 조건이다. 지문을 읽다 보면 복수의 주관이 동일한 인격으로 인식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철학적 상상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서술만 보면 마치 칸트가 우리 몸속에 영혼 같은 것이 있다고 치자라며 근거 없는 가정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칸트가 말한 것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논리적 필수 조건이다. 스마트폰에서 앱이 실행되고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OS가 반드시 깔려 있어야만 하는 것과 같다. 칸트에게 자기의식은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지, 증명할 수 없으니 대충 상상해 본 가설이 아니다. 지문은 논리적 필연성을 단순한 가정으로 격하시켜 설명하고 있다.
둘째, 스트로슨은 칸트의 적이 아니라 리모델링 전문가이다. 지문에서는 스트로슨이 칸트의 신체 경시를 비판하며 과학적 사실을 강조하는 대립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칸트 대 스트로슨을 마치 상상 대 현실 혹은 문과 대 이과의 싸움처럼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스트로슨은 칸트 철학을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하고 싶어 했던 계승자이다. 그는 칸트가 말한 경험의 틀(OS)이 중요하다는 점은 인정했다. 다만 그 OS가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신체(하드웨어)와 결합해서만 작동한다는 점을 보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칸트의 아이디어를 부수려 한 것이 아니라, 더 튼튼하고 현실적으로 고쳐 쓰려 했던 것이다.
셋째, 롱게네스의 자율주행은 차체만 있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문은 선택하려면 신체가 있어야 하므로 신체가 인격의 기준이다라고 간명하게 결론을 내린다. 마치 롱게네스가 신체(몸)의 유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율주행차 비유에서 보았듯이, 롱게네스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단순히 차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차체(신체)를 가지고 도로 상황을 파악하며 스스로 핸들을 꺾는 판단(운전)의 역동성에 있다. 단순히 몸이 있으니 나인 것이 아니라, 이 몸을 이끌고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가기에 나인 것이다.
수능 지문은 매우 논리적으로 잘 짜인 글이지만, 출제를 위해 철학자들의 치열한 고민을 도식화된 상자 안에 가두기도 한다. 그 상자의 겉면만 보고 철학을 단순한 말장난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문의 행간 속에 숨어 있는, 나라는 존재를 해명하기 위해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생각의 이어달리기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텍스트 너머의 진짜 철학자들의 생각을 만나는 방법이다. 거기에 나의 생각까지 덧붙여 보자.
2026학년도 수능 영어 속 칸트 제시문과 본격 설명은 다음 글 <칸트가 칸트했다? (3)>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