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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n 30. 2022

나에 대해서 잘 안다는 남자

옆 팀 김 대리는 몇 명 남지 않은 입사 동기 중 가장 친한 친구다.

둘 중 누가 휴가를 내지 않는 이상 점심도 항상 같이 먹는다.

퇴근시간이 맞는 날은 여지없이 술잔을 부딪치며 하루의 고단함을 불태운다.     


그런 김 대리가 사내 메신저로 은근히 말을 걸어왔다.

커피나 한 잔 같이 마시자 길래 그러자고 했다.     


탕비실 주변은 항상 붐빈다.

보통은 우리 둘 다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데

오늘따라 김 대리는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비상계단에는 우리 둘의 목소리만 들렸다.

워낙 소리가 잘 울리는 곳이다 보니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김 대리네 팀에 새로 들어온 경력 사원에 대한 소문은 나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쉽게도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키도 훤칠하고

탄탄한 몸매에

남성성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마스크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미혼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뜨겁게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경력 사원이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김 대리가 꺼낸다.

알고 보니 같은 대학교에서 비슷한 시기에 공부를 했다.

하지만 전공이 전혀 달라서 마주칠 일이 없었을 텐데

아무튼 세상이 좁긴 좁나 보다.


문제는 그 경력 직원이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 대리도 그게 영 찜찜했던 모양이다.

대학교 때 내가 어떤 남자와 교제를 했고 어떤 식으로 깨졌는지

무슨 동아리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주량은 얼마나 되는지

담배를 피우다가 끊었다는 사실까지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까지 김 대리에게 이야기했단다.     


김 성철.

아무리 대학 시절의 기억을 들춰봐도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전화번호 저장 목록을 뒤져봤지만 당연히 그런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다시 시작하려는데 집중이 되질 않는다.

회사 직원 정보 시스템에서 검색을 해봤지만

아직 입사 초기라서 그런지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얀 빈칸만이 나를 응시한다.     


자리로 찾아가서 몰래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싶었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퇴근을 같이 하자는 김 대리의 메시지에 그러자고 했다.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그 경력 사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다.     


짝사랑.

김 대리가 내린 결론이다.

김 성철 씨가 대학시절 나를 몰래 흠모했을 것이라는 추측.

그리고 나를 부럽다는 식으로 쳐다보는 김 대리의 음흉한 미소.

오후 내내 냉랭했던 감정이 소주병이 비어갈수록 뜨뜻하게 달아오른다.     


오다가다 마주칠 법도 한데

영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여직원 사이에서 ‘인기남’으로 등극해서

더 보기 힘들어진 건가?


모니터 우측 하단에 메시지가 뜬다.

김 대리였다.

말투에서 흥분이 뚝뚝 떨어진다.

김 성철 씨가 저녁에 셋이서 같이 술자리를 갖자고 했단다.     


김 대리와 김 성철 씨가 먼저 나가서 자리를 잡았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는데 

일단 대충 덮어두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화장을 고치고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물로 입을 헹구고 가방에서 향수를 꺼내 손목에 살짝 뿌린다.     


처음 뵙겠습니다.

달아오른 얼굴이 들킬까 소주잔부터 기울인다.     


김 대리가 묻는다.

성철 씨는 이 친구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짝사랑했구나? 맞죠?     


아. 그게. 사실.

대학교 때 이 분하고 같이 교양수업을 들었거든요.

김 성철 씨가 주저하며 말을 꺼낸다.     


맞네. 맞아. 그때 한눈에 반했구나?

김 대리의 호들갑을 틈타 성철 씨를 힐끔 훔쳐본다.

소문대로, 아니 소문 이상이다.

상상력이 미래를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성철 씨의 도톰한 입술을 보며 다음에 이어질 말에 집중한다.     


교양 수업 때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그 당시 제가 워낙 숙맥이라 제대로 말도 못 하면서 더듬거렸는데

갑자기 커다랗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웃음의 주인이 바로 이 분이었어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나 큰 상처라서 한 동안 학교도 못 나갔죠.     


그랬다.

김 성철 씨는 한참 동안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은밀하게 내 뒷조사를 하고 다녔단다.

그러다가 내가 뜬금없이 어학연수 때문에 사라지자 분을 삭이며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나를 먼발치에서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봤단다.     


멍하니 김 성철 씨를 바라보는데

얼굴이 갑자기 시원하다.     


당황한 김 대리가 티슈로 내 얼굴에 묻은 소주를 닦고

유쾌, 상쾌, 통쾌하다는 얼굴의 경력 사원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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