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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l 03. 2022

야구공 하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1위를 확정한 팀과 꼴찌가 확실시되는 팀 간의 경기.

딱히 승부에 관심이 없는 관중들이 맥주로 목을 축이며 삼삼오오 모여 관람하고 있다.     


4회 초.

1위 팀의 Ace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자 잠잠하던 응원석이 조금 들썩인다.

한국시리즈까지 기다리려면 긴 시간이 남은 관계로

컨디션을 조절하라는 감독의 배려로 예상된다.     


타자는 미국에서 온 용병.

사실상 최약팀을 혼자서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적이 훌륭했다.

시즌이 끝나면 내년부터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뛸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된 적도 있다.

나이도 많지 않아 연봉도 상당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1구 타격, 파울.

2구 타격, 파울.     


만만치 않은 두 선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심판이 새 야구공을 주머니에서 꺼내 투수에게 전달한다.     


3구. 

투수의 손에서 떠난 맹렬한 직구가 타자의 안면을 강하게 가격한다.

피할 틈도 없이 공에 맞은 타자는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진다.

타석으로 서서히 걸어가는 투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피가 흐른다.

급하게 달려온 스태프들이 구급차를 부른다.

지혈을 하는 수건에 붉은 피가 배어 나온다.     

관중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지만 맥주와 치킨을 손에서 놓지는 않는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심판은 투수에게 퇴장을 명령한다.

투수는 떨리는 손을 글러브로 숨기고 급히 라커룸으로 빠져나간다.     


경기는 속행되고 별다른 이변 없이 1위 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경기장 내에 폭죽이 터지고 요란한 음악에 맞추어 달려 나온 선수들은

하나로 엉켜 페넌트 레이스 우승을 자축한다.

하지만 Ace 선발 투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의 부기가 빠지면 바로 수술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워낙 강하게 맞았기 때문에 왼쪽 눈 실명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진단 결과를 발표했다.

선수 생명이 완전히 끝났다는 말이었다.     


투수는 자책했다.

자신의 공이 타자의 얼굴을 강타할 때의 그 끔찍한 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국시리즈 1차전.

당연히 선발로 올라와야 할 Ace 투수 대신 2 선발이 마운드 위에 섰다.

타석에 누군가 서 있으면 더 이상 공을 뿌리기 어려운 상태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돈다.

그렇게 대투수라고 불리던 한 선수의 커리어가 트라우마로 인해 막을 내렸다.     


시리즈가 모두 끝나고 매체들은 각종 루머와 추측들을 쏟아낸다.

회복 중인 타자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기자 회견을 열었다.

“경기 중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개소리하지 마라.

녀석이 내 인생과 우리 가족의 미래를 모두 망쳤다.

나는 그를 저주한다. “     


투수는 숨었다.

사과의 말도 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움에 떨었다.

누구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고 혼자서 깊은 수렁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갔다.          


스토브 리그가 시작되고 얼마 후.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철행 심판이시죠? 저 ‘스포츠와 선수’라는 잡지사의 기자 최민호라고 합니다.”

“네. 무슨 일로.”

“지난번 헤드 샷 사건 때문에 전화드렸는데요.”

“말씀하세요.”

“사실 그날 저도 취재차 현장에 있었습니다. 다들 끔찍한 상황에 놀라서 우왕좌왕할 때 제가 찍은 사진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봐도 뭔가 영 석연치 않아서요.”

“뭐가요?”

“왜 그때 그 공을 몰래 주머니에 숨기셨나요? 이미 더 이상 쓰지 못할 공이 되었는데 말이죠.”

“무슨 소리하는 겁니까?”

“저도 일 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시죠. 기사화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기자로서 궁금할 뿐입니다.”     


심판은 모두 털어놓았다.

어쩌다 보니 스포츠 도박에 연루되어 사전에 작업한 공을 투수에게 전달했다고 고백했다.

선수가 느끼지는 못했겠지만 실밥에 특수처리를 해놨기 때문에 손에서 그렇게 빠진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두 선수를 망치는 결과로 이어질지는 전혀 몰랐다며,

반드시 비밀 유지를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랬군요. 대충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듣고 나니 저도 나름 선수 출신이라 화가 치밀어 오르네요.”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습니까? 돈이 필요하다면......”

“됐어요. 자, 제 말 잘 들으세요. 다음 경기 주심으로 나가게 되면 말이죠. 첫 공은 무조건 볼로 선언하세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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