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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l 04. 2022

과거로 가는 아이

아들은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막 걸음마를 배우던 시절부터 집 근처에 있는 미술관을 자주 방문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이루지 못한 화가라는 꿈이 아이의 핏줄로 흘러들어 갔을지도 모르겠다.     


미술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림이 일취월장했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표현 방식에 벌써 본인만의 스타일이 생겼다.

그렇다고 유연함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라 내심 뿌듯했다.     


교우 관계가 그림과 연관되는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아쉽긴 했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 이상을 포기해야 한다.

100퍼센트 효율을 보이는 기계장치가 없고

Input을 넘어서는 Output은 없는 법이다.     


그저 지나가는 열병이라고 생각했다.

3일 연속 학원도 못 가고, 꾸준히 채워나가던 캔버스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아이는 억지로 붓을 들려고 했지만 떨리는 손 때문에 금방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일주일이 지나자 드디어 약효가 돌았는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항체가 바이러스를 몰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열이 내리자 아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 이후부터였다.

아이는 꿈을 꾸었고, 그것을 그렸다.

미친 듯이 꿈을 꾸었고, 그것을 미친 듯이 그렸다.     


공룡.

공룡이라면서 그린 그림은 내가 알던 그것들과 너무나 달랐다.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커다란 이빨만 비슷했지

분위기와 생김새가 확연하게 상이했다.     


피라미드.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장면을 마치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나갔다.

땅을 파는 것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100장에 걸쳐 묘사했다.     


마추픽추, 만리장성, 공중정원, 아틀란티스 등등

아이는 꿈에서 본 것을 그대로 옮겨 그렸고

그 그림들은 우리가 익히 알던 기록이나 연구결과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아이를 유명하다는 신경정신과 병원에 데려갔다.

꼼꼼하게 검사를 진행했지만 별다른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시상하부가 보통의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크다는 진단을 받았다.     


자고 그리고 먹고, 자고 그리고 먹고 밖에 없었다.

대화를 포함해서 다른 행동은 극도로 자제하면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갑자기 시작되었으니 갑자기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만 가지고 묵묵히 지켜보았다.     


공룡.

공룡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세계를 발칵 뒤집었다.

그동안의 지식이 송두리째 폐기되었다.

그리고 그 공룡의 모습은 아이가 그린 그림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아이는 과거를 그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과거를 걷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신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감 때문에

가까운 지인들이 아니면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알리지 않았는데.     


아이가 그린 그림을 정부기관에서 전부 수거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니, 끌고 갔다.

세계 안보가 걸린 문제라면서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저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남겼다. 


오늘도 연락이 없다.

아주 가끔 휴대전화나 메일로 전달되는 사진 몇 장이 전부다.

너무 억울하고 황당해서

신문고에도 올려보고 신문사와 방송국을 찾아가 봤지만

번번이 내가 무기력하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다.     


아이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그런 건 전혀 궁금하지 않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지

그리고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누가 속 시원하게 알려주면 좋겠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당시의 꿈을 꾼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고, 밥을 먹고, 울고 웃는 꿈을 꾼다.     


나 역시 꿈속에서 과거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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