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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l 06. 2022

호의 (好意)

이 집으로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하고 비슷한 연세쯤으로 보였는데 

흰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네셨다.     


좋은 인상 탓이었을까? 아니면 어머니가 생각 나서였을까?

평소에 엘리베이터나 동네에서 이웃사람을 만나도

인사는커녕 고개만 푹 숙이고 다니던 소심한 내가

그 할머니가 보이면 먼저 가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친해지고 나자

할머니께서는 몇 호에 사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별 고민 없이 805호라고 알려드렸다.     


그 후로 할머니는 수시로 우리 집 벨을 누르셨다.

먹는 게 부실해서 그렇게 빼빼 마른 거 아니냐며

(사실 나는 표준 몸무게보다 훨씬 무겁다.)

반찬을 거의 삼일에 한 번 꼴로 가져다주셨다.


혼자 사는 처지라 끼니를 대충 때우고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덥석 덥석 받아먹었다.     

그런데 점점 빈도수가 늘어가고

값 비싼 재료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명절이 되면 과일과 떡을 포함해서

형편이 되지 않아서 멀리서 입맛만 다시던 고급 소고기 부위도 

여러 차례 손에 쥐어 주셨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내 생일날 아침에는 예쁜 보자기로 싼 냄비가

현관문 앞에 놓여있었고

그 안에는 미역국이 가득 들어있었다.     


할머니께 뭐라도 해 드리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완강하게 말씀하셔서

그저 감사하다는 인사로 대신해야 했다.     


거의 아홉 달에 걸쳐

할머니는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과 선물들을 챙겨주셨고

나는 그저 매번 싹 비운 빈 그릇만 덜렁 돌려드렸다.     


그쯤 되자

아니 그제야

슬슬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걸까?

나한테 뭘 바라시는 걸까?     


의심이 솔솔 자라나더니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할머니 딸하고 닮았나?

적적하시고 심심하신가?

전생에 내 남편이셨나?

치매에 걸리신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설마 내가 모르는 부모님의 원수?

이사 오기 전 이 집에 살던 사람에게 마음의 빚을 지셨나?

방송국 몰래카메라인가?

누가 논문을 쓰려고 나 가지고 실험을 하는 중인가?

혹시 그 할머니가 나의 친엄마인가?

살이 포동포동하게 찌워서 잡아먹을 생각인가?

할머니가 큰돈이 필요해서 나한테 작업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 (나 완전 거진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털어내고 할머니께 직접 여쭤보기로 했다.     


깨끗하게 설거지한 그릇을 챙겨놓고 

할머니를 기다리기로 했다.

조만간 또 오시겠지.     


할머니가 일주일째 오시질 않는다.     


할머니가 한 달째 오시질 않는다.

우연히 마주칠 법도 한데 보이시질 않는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댁으로 찾아가 봐야 하나?     


맞다. 

그러고 보니 난 그 할머니가 몇 호에 사시는지도 모른다.          



배가 고프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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