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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l 19. 2022

표정

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지 못합니다.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저에게 웃는, 찡그린, 화난, 슬픈 얼굴이라면서 보여줘도

감정을 알아채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재차 확인할 뿐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사람의 표정이 중요하지 않은

SF나 공룡이나 동물들이 주연인 작품을 선호합니다.

대사나 자막으로 대충 유추해서 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배우의 연기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면

여지없이 중간에 극장을 빠져나오곤 합니다.     


여전히 그 뜻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사이코 패스’니 ‘소시오 패스’니 하면서

저를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저께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친구가 애인과 헤어졌다면서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해서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울먹이는 말투와는 다르게

호흡과 목소리에

실연의 고통이 전혀 묻어 나오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너 진짜 헤어진 거 맞아?”     


그랬더니 금세 분위기가 바뀌고

깔깔 거리며 웃음을 토해냅니다.

얼굴 보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이코 패스’와 ‘소시오 패스’

여전히 그 뜻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조금 감이 잡히긴 합니다.     


감정이 드러난 표정을 본 적이 없으니

저도 표정을 만들지 못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연습을 해 봤지만

뭐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직장 상사한테 무지 깨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잘못했다는 표정을 지으려고 시도해 봤는데

오히려 회사에서 잘릴 뻔했습니다.

동료들 말로는 제가 해맑게 웃었답니다.     


그 후로는 의도적으로 

어떤 표정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 자체가 없는 것은 또 아닙니다.

저도 즐겁고, 열받고, 외롭고, 아프고

그런 거 다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평생을

표정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지만

나름 좋은 점도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의 목소리와 호흡에서

진심을 잡아내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감정이라는 범위 안에서라면

저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표정을 신뢰하기 때문에 쉽게 속는 것 같습니다.

웃으면 기분이 좋은가 보다 생각하고

울면 슬픈가 보다 믿어버리고

화를 내면 기분이 상했나 보다 짐작해버립니다.     


하지만 저는 그 속에 있는

진짜 감정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습니다.

단, 말로 표현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화 하나가 더 생각나네요.

다리가 불편하신 엄마를 모시고 상가(喪家)에 간 날입니다.

엄마와 상주인 엄마 친구가 인사를 나누던 순간이었습니다.

표정과 대사 자체만 보면 상주의 비통한 심정과

그를 위로하는 엄마의 애틋한 말이 오고 갔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주도 엄마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오늘도 이상한 세상에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이코 패스’와 ‘소시오 패스’

여전히 그 뜻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뭐, 살다 보면 알게 되는 날이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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