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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Sep 15. 2022

사과를 하려면 연필로 쓰세요.

꿈으로 가득 차 설레이는 이 가슴에
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전영록 님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곡의 가사 일부입니다.

1983년도에 발매된 앨범의 수록곡임에도 전혀 오래된 느낌이 없습니다.

요즘 가요만큼, 아니 그 이상 정제되고 세련된 노랫말처럼 들립니다.   


그 당시에는 이메일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였으니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직접 얼굴을 보면서 말하거나
집전화 혹은 편지나 쪽지로 표현해야 했죠.   


저 역시도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같은 반 친구보다 먼저 집으로 달려가서 
대문 아래에 고백이 담긴 편지를 내려놓고 도망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참 순진하고 귀여웠던 것 같습니다.

(궁금해하실 분이 혹시라도 계실 수 있으니 결과를 알려드리자면,

정말 기쁘게도 그녀는 제 고백을 받아주었습니다.)   


요즘은 어떤 식으로 사랑을 고백하는지 궁금하군요?

설마 몰래 간직했던 마음을 카톡이나 문자 혹은 이메일로 

성의나 낭만도 없이 툭 던지지는 않겠죠?

문명의 이기(利器)도 좋지만.......
아닙니다. 말이 길어지면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죠.



이 글을 쓰는 중간에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나서 연필 한 자루를 칼로 정성 들여 깎았습니다.

깨끗한 종이도 한 장 준비했습니다.

30여 년 전처럼 수줍은 사랑 고백은 아니고요.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사과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그저께 저녁에 아이와 심하게 다투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다퉜다기보다 일방적으로 혼을 냈죠.   


따지고 보면 제가 잘못한 일이었는데

아이는 틀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평소 같지 않게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천천히 연필로 사과의 편지를 쓸 생각입니다.

문자나 카톡으로는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마음

그리고 얼굴 보면 쑥스러워서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워가면서 적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사과의 편지가 아니라 반성문이 될까 봐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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