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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Feb 17. 2023

무서운 행운

오늘 저녁에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2002년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때였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 여행 차 잠시 갔을 때 친구와 함께 일명 파친코라는 기계 앞에 처음으로 앉았습니다. 두어 번 버튼을 누르며 이걸 도대체 왜 하는 건지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을 무렵, 쿼터(25센트)를 먹은 기계가 100 달러 정도를 토해냈습니다. 대박! 딱 거기서 그만하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더군요. 새벽녘 친구와 저는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호텔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2003년

처음 로또 복권을 샀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류장 옆 가게에서 다섯 게임을 샀습니다. 토요일이라 당일 밤에 추첨이 있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깜짝 놀랐습니다. 4등 2개! 각 17만 원씩 총 34만 원에 당첨된 것입니다. 세금을 떼고 받은 돈은 며칠 만에 술값으로 모두 탕진했고, 그 후로 저는 몇 년 동안 매주 복권을 구매했습니다. 1년이 약 52주 정도 되니까 해마다 52만 원에 달하는 돈을 날린 셈입니다. 간혹 5등에 당첨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2010년

두 번째로 이직 한 회사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연말에 극장을 빌려서 장기 자랑도 하고 추첨을 통해 경품을 나눠주는 행사. 저는 그 해 추첨에서 50만 원 상당의 골프채(드라이버)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골프를 중계해 주면 전파 낭비라고 할 만큼 관심이 없던 저에게 고가의 드라이버는 쓸모없는 작대기일 뿐이었죠. 하지만 그 골프채로 인하여 주변 지인들에게 골천(골프 천재) 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입문하게 되었고, 결국 전파 낭비와 노인네들의 한가한 놀이라고 비웃었던 그 스포츠를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소소한 내기 골프에서 번번이 깨지면서 말이죠.



  비교적 최근입니다. 

저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주가에 불이 붙었을 때 처음 주식 거래 계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액으로 몇 번 단타를 치면서 소주 값 정도를 벌었죠. 그러다가 소고기가 눈에 아른거렸고, 뒤이어 찰랑찰랑 양주병손에 잡힐 것 같았습니다. 투자금은 급격하게 늘어갔고 그렇게 거의 반년 치의 연봉을 날리고 나서야 반강제적으로 주식 거래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속이 쓰리고 잠이 오질 않습니다. 으악! 이 이야기는 괜히 꺼냈나 싶네요.



  아마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분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채셨을 겁니다. 이름과는 다르게 어두운 포스로 가득 찬 바로 그 녀석.


  초심자의 행운!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녀석이 저에게 ‘봤지? 로또 1등 당첨이 너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확률이 아니야.’라며 속삭였고, ‘어때? 해보니까 주식은 돈 놓고 돈 먹는 꿀단지지?’라고 유혹했으며, ‘넌 타고났어. 연습 따위 필요 없어. 내가 오죽했으면 골프채까지 너에게 선물해 줬겠냐?’라면서 꼬셨습니다.     


  처음 무언가를 시작하게 되면 그렇게 희한하게 운이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운이 저를 우쭐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대단하게 느끼게 만들게 하더니, 어느 한순간 갑자기 돌변해서 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단단한 바닥에 내팽개치더군요. 실력이 뒤따라야 했음을, 무척 낮은 확률에 무모하게 도전하고 있었음을 깨우치긴 했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뿐이었죠.     



  어제 고스톱을 처음 치는 아내와 아이에게 대판 깨졌습니다. 기고만장한 둘의 표정을 가슴에 새기고, 동전을 챙기면서 저를 비웃었던 애송이들을 떠올리며, 저는 속으로 바득바득 벼르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또 치자. 지금을 마음껏 즐겨라, 이것들아. 곧 매운맛을 보여주마. 초심자의 행운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겠어.’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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