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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Nov 18. 2023

면죄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나에게는 면죄부가 있다. 중세 시대에 금붙이를 받고 팔았다는 그 면죄부와는 의미가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비슷한 구석도 있다. 둘 다 본인이 저지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Free Pass'니까.


 저세상으로 먼저 떠난 남편 덕분에 내 면죄부는 'Up'grade 되었다. Upgrade라는 표현이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쓰니까 나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남편 장례를 치르고 나자마자 내 면죄부는 1.5에서 3.0이 되었다가 한 달 전에 1.0으로 수정되었다. 남편은 안타깝게도 면죄부를 써보지도 못하고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다. 슬픔이 너무 강해서 마치 영혼이 눈물로 흘러 사라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지만 이제는 조금씩 적응을 해 나가고 있다. 만약 면죄부가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과거를 서성거리고 있었겠지.


 아빠의 부재로 인한 결핍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직전에 아이들을 보살필 정도로 회복되어 천만다행이다. 막내아들은 가끔 자신도 모르게 아빠를 부르며 서재로 달려가곤 하지만 형과 누나가 잘 다독여 주고 있어서 안심이 된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조금 더 많이 보다가 갔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일반적인(이 세상에서 일반적인 사고란 없겠지만) 교통사고가 아니라 음주 운전자의 뺑소니 사건의 희생자였다. 사고 직후에는 숨이 붙어있었다는데 술에 잔뜩 취한 운전자와 그의 애인은 유기견 부딪힌 줄로 착각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갔다고 진술했다. 덩치가 만 한 사람이었는데 개로 오해했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술에 깬 상태에서도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의심스러워 마약 반응 검사도 추가로 진행했는데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술과 마약에 절어서 멀쩡한 사람을 차로 치어 죽게 내버려 두고 나 몰라라 도망쳤는데 형량은 고작 3년이었다. 초범+심신 미약+전관예우를 받는 값비싼 변호인단+반성문+거짓 눈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자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그들에게는 내가 갖지 못한 다른 면죄부가 있었다. 연금술까지 포함된.


 1년. 또 1년.

 지옥 같은 나날이 계속되면서 나는 '고작 3년'이라 다행이라 여겼다. 만약 20년이었다면 과연 버틸 수 있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다.


 운전기사가 딸린 멋진 차가 교도소 두 곳에 차례로 들러 그들을 태웠다. 커플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처럼 행복해 보였다. 한참을 달려 그들이 내린 곳은 번화가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은밀한 술집이었다. 둘이 들어가고 곧이어 비슷한 또래의 남녀들이 줄줄이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만약 남편이 안치된 납골당에 먼저 들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저녁이 밤이 되고 밤이 새벽이 되고 새벽이 아침이 될 때쯤. 그 둘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왕 죽는 거 조금 덜 고통스럽게 보내주려는 나의 배려를 그들이 알턱은 없지만 굳이 생색낼 생각도 없다. 비틀비틀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빨간색 스포츠 카를 향해 걷는 그들 뒤로 조용히 다가가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수백 수천 번 머릿속에서 그렸던 것처럼 심장이 있을 법한 곳에 한 발씩 더 총을 쏘았다.


 휴대전화로 경찰에 신고했다. 총소리를 듣고 술집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얗게 질렸다. 그중 인상이 험악한 녀석들이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경찰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에 움찔하며 서둘러 도망치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순식간에 나와 시체 두 구만 남았다.


 경찰이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전에 나는 주머니에서 면죄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경찰은 자주 겪었던 일인 양 바로 무전기를 통해서 조회를 요청하더니 수갑을 도로 허리로 가져갔다.


 경찰서에 같이 간 나는 간략히 조사를 받고 조서를 꾸몄다. 내가 죽인 두 명의 부모가 나를 노려보면서 무언의 협박을 했지만, 그냥 무시하고 묵묵히 면죄부를 되돌려 받았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들 네 명의 면죄부는 모두 0.5다.


 아이들이 아빠의 복수를 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남은 1.0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잘 보관하고 있어야겠다. 저들로부터 나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나의 무기니까. '끝없이 치솟은 불임률'과 '극도로 저조한 출산율' 덕분에 갖게 된 무시무시한 선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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