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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Nov 16. 2023

시험

 최신형 금고 속에 보관 중이던 시험지 뭉치가 삼엄한 경계 속에서 각 반 시험 감독관에게 배분되었다. 시험 시작까지 10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긴장의 끈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 이 날을 위해 짧게는 10년 길게는 70년을 준비한 사람들도 있다. 사소한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교실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의 면모는 제각각이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다. 앳된 얼굴의 청소년부터 손주를 봤을 법한 어르신까지 각양각색의 수험생들이 고사장을 빈자리 없이 채우고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던 남자가 화장실에 가려는 지 일어나자 덩달아 몇몇이 따라 나간다.


 일 년에 한 번. 전국 곳곳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시험이다 보니 정부에서는 임시 공휴일로 지정을 했다. 특별 편성된 뉴스에 등장한 자칭 전문가가 작년 시험이 비교적 쉽게 출제되었기 때문에 올 시험의 난이도는 다소 상향될 것이라 뻔한 예측을 했다. 변별력도 중요하지만 사교육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안이 빨리 마련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도 덧붙인다.


 총 네 개 과목이며 각 과목마다 두 시간씩 주어진다. 워낙 넓고 다양한 범위에서 이해력과 문제 해결력을 평가하기에 만만한 과목은 없다. 그저 공부한 범위와 풀게 될 문제 사이에 교집합이 많길 기대하는 방법뿐이다. 작년에 거의 만점을 받은 수험생은 딱히 시험대비를 했다기보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가진 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발언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최고의 비법인 것은 분명하다.


 작년에는 약 천만 명이 응시를 했고 그중 삼만 명이 커트라인을 무사히 넘어갔다. 비율로 따져보면 고작 0.3%의 합격률에 불과하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두 차례 면접도 통과해야 비로소 손바닥의 1/3만 한 크기의 자격증을 하나 받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일단 합격만 하면 집안의 경사나 마찬가지다. 특히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중 하나는 국가에서도 따로 관리 중이다.


 고사장으로 감독관 세 명이 들어오자 일순간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않던 책과 자료를 가방에 전부 집어넣는다. 휴대전화를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는 이미 입실할 때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모두 반납했다. 


 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험은 시작되었다.


 듣기 평가 문제가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벌써 한숨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전년도 대비 문제의 수준이 부쩍 높아졌다. 하지만 이제 막 출발선을 벗어났을 뿐이다. 이번에 실패하면 또 꼬박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문제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인다.


 시험을 주관하는 관계부처의 직원들 신상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있다. 보안이 곧 생명이다. 몇 번 비리와 부정의 정황이 포착되어 국정감사에 안건으로 올라갔었지만 다행히 헛소문으로 밝혀졌다. 워낙에 다들 불을 켜고 감시하는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무모한 모험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1교시가 끝나자 답을 맞혀보는 무리와 다음 과목을 준비하는 무리로 나뉜다. 고작 15분의 시간이 2교시 성적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부류가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긴 했다.


 고사장 안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영구적으로 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당한다. 서로서로 불미스러운 일을 피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시험 감독관이 따분한 지 조용히 하품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고사장 밖에는 응원하는 부모나 지인들로 북새통이다. 80 데시벨 이상 소음을 내면 바로 경찰에게 연행되기 때문에 간절히 절을 하거나, 소리를 죽여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먹구름이 몰려와 차가운 가을비를 뿌렸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시험이 모두 끝나자 고사장 밖으로 우르르 수험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홀가분한 얼굴, 우울한 얼굴, 웃고 있는 얼굴, 눈물 흘리는 얼굴 등등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대부분의 표정이 보인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가볍게 안아주거나 어깨를 토닥이며 힘들었을 하루를 쓰다듬어 준다. 비가 멈춘 자리에 추위가 스며들었다.


 수학능력평가가 끝난 날처럼 술집이나 유흥가가 붐비지는 않는다. 시험 결과가 당일 밤에 나오기 때문에 다들 숨죽이고 휴대전화의 화면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밤 10시 정각이 되자 곳곳에서 문자 알림음이 울린다.


 '안타깝지만 제26차 성인인증평가에 불합격하셨습니다. 계속 미성년자로 지내셔야 함을 고지합니다.'

 이런 문자를 받은 사람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다.


 '축하합니다. 제26차 성인인증평가에 합격하셨습니다. 곧 있을 면접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면접 장소와 시간은 별도 안내 예정입니다.'

 반면 이런 문자를 받은 사람은 환호성을 지른다. 면접이 남긴 했지만 그토록 바라던 성인이 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최종 합격이 되면 기본적으로 술, 담배, 결혼, 선거, 운전, 성인 전용 매체 이용, 주요 국가고시 응시 등이 가능해진다. 그 외에도 다양한 특권이 두 팔 벌리고 환영한다. 잔소리, 신용카드, 연애, 혼자 여행, 유흥, 미술 및 음악 등을 포함한 창작활동에 이르기까지 미성년자일 때 금지되었던 사항들이 일제히 해제된다. '제2의 인생'이라고 부를 만하다. 물론 5년이 지나면 성인 유지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사건 사고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대부분 수월하게 통과하는 편이라 다들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정부에서는 뉴스를 통해 이번 성인인증평가에서 13세의 최연소 합격자가 나왔으며 최고령은 77세라고 발표했다. 남녀 성비는 이번에도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거의 10 퍼센트포인트 높다고 설명했으며, 점점 감소하는 합격자로 인하여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영어, 불어, 중국어, 독일어, 일본어로 된 시험지가 준비되고 있는데 앞으로 차차 더 늘려갈 예정인가 보다.


 매해 엄청난 예산이 '성인 인증'에 투입되지만 그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급성장한 국가 경쟁력 때문에 아무도 개의치 않고 있다. 더불어 범죄율도 급감하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항상 손꼽힌다. 다만 계속 미성년자로 남으려는 일부 몰지각한 국민들에 대한 제재안으로 혼밥 금지, 가슴에 노란색 이름표 달기, 카페인 섭취 금지, 횡단보도 건널 때 손 들기, 밤 10시 이후에는 혼자 외출 금지 등도 발의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나저나 얼마 전부터 대통령 후보 중 한 명의 수험자 시절 모의고사 성적이 본시험과 큰 차이를 보였다는 제보가 잇달아 소문의 진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형 게이트로 번지는 것은 아닐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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