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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y 19. 2024

흰 머리카락

 당근~


 요즘 같은 시기에 시급 25000원도 감지덕지한데 해야 하는 일은 정말 뜻밖이었다. 긴가민가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채가기 전에 다급히 지원하기 버튼을 눌렀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런 동네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골목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드디어 나를 고용한 분의 집을 찾아냈다. 솔직히 집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정도로 허름해서 안으로 들어가기 떨떠름했다. 하지만 그러다간 아르바이트 애플리케이션 평판이 떨어질 것이 걱정되었기에 용기를 냈다.


 "흰 머리카락 좀 뽑아줘. 따갑지 않게 아주 천천히 조심조심."


 할아버지인지 할머니인지 외모나 목소리로는 구분이 힘든 노인이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나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좁디좁은 집안을 꾸민 형형색색의 살림살이로 미루어 짐작건대 할머니가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정말 흰머리만 뽑으면 돈을 준다고요?"


 담배를 비벼 끄고 만 원짜리 두 장과 족집게를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끝나면 오천 원 마저 줄게. 그리고 나 할머니 아니다."


 취향 한 번 독특한 할아버지군.


 "할아버지. 모자 벗으세요. 그래야 뽑죠."


 할아버지는 한겨울임에도 난방을 하지 않아 썰렁한 방에서 털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나 할아버지 아니다."


 할머니도 아니고 할아버지도 아니고 그럼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의구심은 금방 깨끗하게 사라졌다. 모자 밑에 가려져 있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해? 빨리 뽑지 않고. 한두 개가 아니지? 한꺼번에 다 뽑으면 머리숱이 갑자기 적어 보이니까 오늘은 스무 가닥 정도만 뽑아. 아프지 않게 천천히. 아픈 건 딱 질색이야. 특히 머리 아픈 건 최악이고. 그리고 중간중간 자네 이야기나 좀 하면 좋고."


 나는 털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민머리를 마주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식들이 흰머리 많다고 안 찾아오는 거 같아. 그래서 이제 신경 좀 쓰려고."


 족집게로 민머리 곳곳을 조심스레 누르며 시간을 보냈다. 내 이야기를 하라고 했지만 정작 내가 입을 연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저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한 시간이 다 되었네요."


 사실 55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빨리 일어서고 싶었다.


 "그래? 시간 참 잘 가네. 흰머리 뽑은 거 어딨어?"


 잠깐 당황했지만 그런 기색을 잘 숨기고 조금 전 화장실 갔을 때 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나저나 신통하게 하나도 안 아프게 잘 뽑네. 다음 주 이 시간에도 또 와줄 수 있어? 시급 5000원 더 줄 테니."


 고작 이야기를 들어주고 시급 30000원을 받는 알바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게다가 집도 가까우니 꿀 아니라 꿀단지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래요. 다음 주에도 오후 2시에 올게요."


 할머니인지 할아버지인지 모를 그분은 계약금이라며 잔금 5000원은 다음에 오면 한꺼번에 주겠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길길이 날뛰며 따졌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다음 주에 뵐게요."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혼잣말이 들린다.


 "이제 우리 아기들이 나를 알아보겠지? 나이 서른에 흰머리라니 정말......."


 머리에 길게 새겨져 있던 십자가 모양의 수술 자국을 떠올리며 나는 당근 애플리케이션에 글을 올렸다.


 "흰머리 삽니다. 개당 100원"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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