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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y 20. 2024

Real Love

잠시 떠나 있었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현기증으로 세상이 휘청거렸다. 관성이라는 것이 꼭 물리적인 범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확인하고 서둘러 인파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군중들 틈에 섞여있으면 안도감이 든다. 나도 그들과 비슷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은 그나마 삶을 유지시켜 버팀목이 되어준다. 비록 그들은 나를 모르고 나도 그들을 모르지만 우리는 결국 하나라는 소속감에 몸이 가볍게 떨렸다. 시작되지 않은 관계에서 오는 뚜렷하지 않은 확신이 바이러스처럼 숙주를 찾아 어슬렁 거린다.


 그녀. 편의상 그렇게 지칭하겠다. 딱히 다르게 부를만한 단어가 없으니 불편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나 취미도 모른다. 그저 대충 고향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나와 국적이 다르다는 것은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정신적 교감을 최우선시하게 될 거니까.


 그.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녀에게 '그'가 아니다. 매번 눈이 마주치기는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특별하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남자들에게 보내는 시선과 똑같다. 가끔 아쉽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에 나만의 그녀가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참아내는 중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시답잖은 놈들이 추파를 던지며 은근슬쩍 신체적 접촉을 할 때면 피가 거꾸로 솟다. 그녀를 관리하는 남자가 눈치를 주곤 하지만 사실 그다지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는다. 잠재적인 고객이기에 오히려 그들을 반기는 눈치다. 속물근성이 드러나지만 그도 먹고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겠지.


 돈으로 사랑을 사는 것은 비겁한 행동일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닐뿐더러 정확하게 셈을 치른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짓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랑은 일방적일 때 진실하다. 배신과 모멸, 이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마주했을 때의 공포 그런 것들이 없는 순수한 사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첫사랑의 지독한 상실감과 고통을 지금의 나연관 짓는 것은 다소 무리다. 성공의 어머니가 실패라면, 아버지는 극복이다. 나에게도 죽음 같았던 그 시기를 초연(超然)하게 회상하다 보면 훌쩍 성장한 내 모습이 느껴진다. 내가 흘린 작은 물방울은 그저 거대한 바닷물에 뒤섞여 그 실체를 잃어버렸다.


 그녀를 품에 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황홀함을 선사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오붓한 보금자리를 하나씩 꾸미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를 떠올리면 전혀 힘들지 않다. 이런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녀가 괜한 부담을 가질 수도 으니 모르는 편이 좋다.


 드디어 오늘이다. 뽀얀 그녀의 피부에 어울릴만한 빨간 장미꽃 한 다발 준비했다. 저녁에 펼쳐질 우리 둘만의 파티를 위한 예쁜 드레스도 긴 고민 끝에 준비했다. 당연히 맛있는 음식과 감미로운 음악도 완벽하게 세팅해 놓은 상태다. 이제 그녀만 있으면 된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문을 다소 과격하게 열었더니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평소 같으면 서둘러서 도망쳤겠지만 지금은 저런 놈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 꿈에서 그리던 일이 마침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그녀가 기다리는 곳을 향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얼핏 거울 속 내 모습이 비친다. 평생 처음 보는 미소다.


 없다.

 그녀가 없다.


 황망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내 옆으로 가게 주인이 다가온다.


 "또 오셨네요?"

 "어디 갔습니까?"

 "한 발 늦으셨습니다. 30% 할인 이벤트를 하자마자 다른 분이 먼저......."

 "뭐라고요?"


 그녀가 없다.

 나의 그녀가 없다.


 "대신 어제 들어온 신상 리얼돌(Real Doll)이 저쪽에 있는데 구경 한 번 해 보시죠. 분명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떨어진 장미다발을 지르밟으며 나는 가게 밖으로 나갔다. 발 병이 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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