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열세 개의 금속 덩어리
그믐밤의 하늘은 검은 비단처럼 깊고 매끄럽게 깔려 있었다. 달빛은 숨을 죽이며 옅은 존재감으로 주변을 물들였으며. 힘없는 바람의 결은 땅 위의 먼지를 스치며 속삭이는 음성처럼 들려왔다. 궁의 담장은 거대한 비밀을 가둔 울타리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수많은 처마 끝에는 아직 식지 않은 계절의 열기가 흩어지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성종은 그 고요의 중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임금이라 불리는 사내, 나라의 머리이자 하늘의 대리인.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위엄도 없었다. 그는 덕을 말하는 자였으나, 덕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허무를 품고 있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누구나 알듯이 항상 외로운 존재였다.
방 안에는 여인의 향내가 은은하게 뒤섞여 있었고, 가늘게 피어오르는 초의 연기가 불빛을 따라 천천히 위로 흘렀다. 성종은 그 연기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불을 껐다.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싶었다. 낮에는 나라와 조정을 다스리는 임금이었지만, 밤에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전해오는 체온이 그리웠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그 옆에는 궁녀 하나가 앉아 있었다. 붉은 옷자락, 희미한 분 냄새,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눈빛. 그러나 성종은 그 눈을 오래 마주 보지 못했다.
“그만 돌아가거라.”
그녀는 놀란 듯 머뭇거리다가,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깊이 울렸다.
성종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문밖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발소리가 났다.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그의 음성에는 왕의 심기를 건드릴까 망설이는 기색과 더불어, 기분을 살피려는 배려가 묻어 있었다. 성종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차비노, 오늘 밤하늘이 예사롭지 않느냐?”
“바람이 멎었습니다, 전하. 그래서 더 고요하게 느껴지옵니다.”
“그래… 그 침묵이 나를 삼킬 듯하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나와 함께 걷자. 후원으로 가보자꾸나.”
선잠에서 깬 후원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들을 맞이했다. 옅은 달빛이 비스듬히 내리쬐어 연못 위에 길게 늘어졌고, 물 위의 연꽃잎은 그 오묘한 냄새를 품은 채 고요히 떠 있었다. 성종은 미안함이 깃든 발걸음으로 아끼듯 천천히 걸었지만 이슬은 힘없이 부서져 흘렀다.
사슴 우리 앞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저 녀석들, 세상 근심 모르고 잠들었구나.”
“짐승에게는 내일이 없으니 그리 살 수 있는 것이겠지요.”
성종은 자뭇 진지한 말투로 숨 쉬듯 대답했다.
“짐승에게 내일이 없다면, 왕에게는 오늘이 없도다.”
그가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담벼락 아래에 놓인 바위 아래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흔한 반딧불의 것이 아니었다. 색도, 온기도, 결도 달랐다. 어둠을 머금은 손짓이었다.
성종은 이끌리듯 다가섰다.
바위 아래, 그 빛은 고요히 숨을 쉬고 있었다.
“차비노, 저 바위를 기억하느냐?”
“예, 전하. 몇 해 전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환관 하나가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하지 않사옵니까. 그 일이 너무나 상스러워 커다란 바위로 덮어두었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 자는 내 곁에서 오래 일한 자였다. 그리고 그날, 그 시신 곁에서 작은 금붙이 하나를 주웠다. 그것이… 아직도 내 서랍 속에 있지.”
성종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바위 표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돌은 이상하게 서늘하면서 따뜻했다.
“여긴 단순한 땅이 아니야.”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저 자리를 바로 파 보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오직 너 혼자서. 혹여 무엇이 나오든 그대로 가져오라.”
차비노는 놀란 듯 머뭇거렸다.
“전하, 저 자리는 천벌의 자리라 누구도…”
“입 다물라. 왕이 두려워해야 할 건 하늘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다.”
해가 중천에 다다르기 전, 차비노는 흙투성이가 된 채 돌아왔다. 그의 품에는 낡은 나무상자가 들려 있었다. 상자는 낡고 부서질 듯했지만, 표면의 무늬는 또렷했다.
“전하, 이것이 그 땅속에서 나왔습니다.”
성종이 받은 상자는 크기에 비해 상당히 묵직했다. 구석구석 살피던 그는 허겁지겁 일어나 화려한 궤의 서랍을 열어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싸 놓았던 금속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상자의 중앙에 나있는 구멍에 슬며시 찔러 넣었다.
철컥!
세월의 흔적을 무시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고, 그 안에는 열세 개의 금속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모양은 모두 달랐으나, 각각의 표면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그리고 마지막 하나, 형태를 알 수 없는 낯선 조각.
성종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에 쥐었다. 금속이 아니라, 살아있는 무엇을 잡은 듯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키라… 깨어나라… 잊지 마라…’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려왔다. 성종의 손이 떨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 열세 개의 금속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내게 맡겨진 것인가, 아니면 내가 불러온 것인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상자를 닫고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옆에서 놀란 눈으로 쭉 지켜보던 차비노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하라. 이것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날, 조선의 하늘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궁은 다시 성종 혼자만의 밤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흥분에 휩싸인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예감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어, 열세 개의 금속 덩어리를 둘러싼 이야기의 불씨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