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국어사전 속을 두둥실 떠다니다가 흥미로운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길나장이'
'길나장이'보다는 '길라잡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익숙하다. 초행길에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관광을 하기 위해 길라잡이(가이드)를 소개받거나, 처음 우쿨렐레를 접하는 초보자들에게 길라잡이가 된다는 책 광고를 볼 때면 길라잡이가 무슨 뜻을 가진 단어인지 유추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얼핏 보아 길라잡이와 가까운 친척처럼 보이는 '길나장이'도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을까?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이 외출할 때 길 안내를 맡아서 하던 자'를 '길나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찌 보면 길라잡이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협소한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장이’가 뒤에 붙은 것으로 보아 대장장이나 유기장이처럼 일종의 기술을 가졌음을 인정받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골목골목 어떤 가게들이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속속들이 잘 아는 일종의 마당발이나 故 김주혁 배우가 연기했던 영화 속 홍반장 같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보통 이렇다. 뻔히 드러난 이야기 보다 숨은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기 마련이다.)은 길나장이의 두 번째 뜻이다.
'딱히 볼일도 없으면서 어슬렁어슬렁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를 때 길나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 바쁘지 않다면 함께 상상을 해 보자.
집안에 벼슬을 한 조상도 없고 땅이나 재물도 변변치 않으며 딱히 빼어난 능력도 가지지 못해 밥이나 축내며 방 안에서 뒹굴뒹굴 거리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 모습이 영 탐탁지 않았던 어머니가 등짝 스매싱을 날리며 꼴 보기 싫으니 제발 집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하라며 역정을 낸다.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이 집 저 집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사건건 쓸데없는 참견을 하고 다닌다. 그런 날들이 하루 이틀 이어지자 동네에서 그가 모르는 상점이나 주점이 없었고 어느 집에 어떤 자들이 살고 어떤 일들이 생겼는지 속속들이 알게 된다. 하지만 눈칫밥도 하루 이틀이라고 어디 사소한 일거리라도 없는지 찾아다니던 와중에 벽에 붙은 방(구인 광고)이 그의 눈에 띈다.
내용인즉,
고을에 새로 부임해 온 수령이 워낙에 길치라 건물 밖을 나서기만 하면 길을 헤매고 다니니 옆에 바싹 붙어 따라다니며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을 내 각 집안의 내력과 사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자라면 가산점을 파격적으로 부여한다고 하니 사내는 그 길로 당장 이력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서류 전형과 면접전형(기술전형 포함)을 단번에 통과한 백수 사내는 결국 수령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당당하게 동네를 휘젓고 다니게 되었으니, 어머니도 뿌듯해하시고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땅히 할 일도 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시간만 때우던 발 넓은 사내가 자신에게 딱 걸맞은 '길나장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이렇게 상상을 마무리한다.
오늘도 나는 인터넷, 서적, 사전, 영화와 드라마 속을 딱히 정한 목적 없이 그냥 돌아다니며 시비도 걸어보고 아는 척도 하며 살고 있다. 혹시 알겠는가? 이러다 운이 좋아서 수령을 모시고 다니는 길나장이가 될 수 있을지.
아니다. 그런 거창한 길나장이는 되지 못하더라도 같이 사는 아이에게 그리고 조금 욕심을 부려서 내 글을 읽는 분들께 희미한 빛 혹은 작은 나침반이라도 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사진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