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한국소설 핀 시리즈
⭐⭐⭐⚡
p122
"그러니까 나중에 가는 게 좋겠어."
세영의 말이 끝나자, 도우가 있는 힘껏 컵을 잡았다.
"나중에...... 언제요? 엄마, 시간이 없어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버텨내는 도시민의 불안 같은 게 있다. 학폭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은 친구의 장례식에 가려는 딸을 붙잡는 세영의 파랗게 차가운 불안이 파르르 떨린다.
약사 세영은 남편 무원이 유산으로 받은 지방의 오래된 호텔을 운영하러 떠난 탓에 도심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중학생 딸 도우와 단둘이 지낸다.
무원은 대학원 졸업 후 강의를 하다 사채업자 아버지가 물려 준 호텔을 덥썩 운영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는 그간 버텨온 권태를 뿜어낸다. 자영업을 하는 커뮤니티에 가입해 30대 여성 약사인 척 활동하지만 구경꾼을 넘지 않는다.
세영의 약국을 방문한 학부형들이 가져오는 이야기에는 각자의 이해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필요 이상의 험담과 근거없는 추측은 차일 발생할 지도 모를 불란을 대비한 각자의 요새, 방벽을 쌓아 올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살한 피해자의 장례식에 가지 못한다. 아이들도 가지 못하게 하지만 세영이 뒤늦게 쫓아간 장례식장엔 자살한 친구의 할아버지 할머니 곁으로 아이들이 모여 있다.
어떤 절망과 희망이 묘하게 깃든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어디에도 기울지 않고 막막한 표정으로 경계에서 버티고 섰다. 느닷없이 뛰쳐나온 피해자의 자살이라는 비극의 틈에서 빛 한줄기가 위태롭다.
학군과 이미지, 이기심과 연민, 막연한 죄책감과 인간성, 순수함이나 익명성으로 은폐한 현실을 디디며 산다는 복잡한 관계들 모두가 불안하다.
p49
어떤 말들은 그 위에 티끌 하나 날아와 앉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이 된다. 아무도 모르는 제물을 무엇인가를 위해 계속 번제로 삼는.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성벽을 경계로 아무것도 아닌 자신으로 사는 사람들. 너무 열심히 쌓아 올려서 허무한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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