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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Mar 21. 2016

『깊은 강』, 모든 것이 잠기는

182, 16-38 엔도 슈사쿠



p280
갠지스 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깊은 강>은 작가 엔도 슈사쿠가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통받던 일흔에 펜끝에 모든 필력을 담아 적어내려간 소설이다. 거장의 숨결이 책 곳곳에 담겨있다. 만주에서의 생활과 부모의 이혼, 프랑스 유학과 모리아크에의 심취, 노년 남성의 소회, 전후 세대의 운명까지. 

엔도 슈사쿠는 1996년 9월 29일 게이오 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의 생전 뜻에 따라 <침묵>(1966)과 <깊은 강>(1993)이 그와 함께 관 속에 넣어졌다. 



환생한 자신을 찾아달라는 아내의 유언을 쫓아 인도를 찾은 이소베, 투병 생활 중 죽어버린 구관조를 잊지 못해 인도를 찾은 동화작가 누마다, 태평양 전쟁에서 죽은 동료들을 염불해주기 위해 찾은 기구치, 자신이 유혹한 대학 동기 오쓰의 발자취를 자기도 모르게 쫓아온 미쓰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네명의 인물이 인도를 찾는다. 


p29
눈이 침침해져, 이소베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걸 망설였다. 자신이 죽은 뒤, 남편이 곤란을 겪지 않도록 모든 페이지에 일상생활의 지침을 하나하나씩 기록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 반드시 가스를 점검하는 것이나 욕실 청소법까지. 이런 것들은 지금껏 이소베가 죄다 아내에게 내맡긴 일이다. 그것을 아내는 손에 잡힐 듯 가르치고 있었다.

p61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p264
마음에 찡하도록 와 닿는 건 갠지스 강, 그리고 에나미가 설명해 준 여신 차문다. 문둥병에 문드러지고 독사에 휘감겨 야위고 축 늘어진 젖가슴으로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그 모습이다. 거기에는 현세의괴로움에 허덕이는 동양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것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유럽의 성모와는 전혀 달랐다. 



미쓰코가 대학시절 유혹했던 가톨릭 신자 오쓰는 어렵게 신부가 되어 갠지스 강에서 시체를 옮기고 있다. 죽음만은 갠지스에서 이루기 위해 걸어걸어온 아웃 카스트의 천민들이 지쳐서 길거리에 쓰러지면 오쓰는 그들을 업어 갠지스로 데려온다. 자신의 가슴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던 오쓰는 이제 갠지스의 가트(계단)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 

오쓰의 범신론적 기독교 신앙은 유럽의 신학교, 수도원에서 배척받지만 오늘에는 '진리의 파편'이라는 해석으로 실제 이해되고 있다. 가톨릭에서 시작된 이 해석은 개신교에서도 받아들인다. 물론 이 파편설에는 기독교가 진리자체, 진리의 장자이며 나머지 종교는 진리의 일부분인 '파편'에 불과하다는 의미도 있다.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우아한 피에타의 마리아가 아닌 고통의 극한에서도 민중에게 자신의 젖을 흘려보내는 노파의 모습을 한 '차문다' 여신은 위선의 봉사자요 오쓰를 힐난하는 미쓰코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녀는 갠지스에 자신의 몸을 담군다. 그리고 양파(신)에게 말하는 기도일지 모를 말을 갠지스에 한마디 한마디 흘려보낸다.

시신을 찍던 초지일관 무례한 일본인 여행자 산조는 분노한 힌두교도들에게서 도망치고 산조로 오해받은 오쓰는 가트위에서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구타당한다. 미쓰코는 소리지르며 갠지스에서 나와 피투성이 오쓰를 구하고 그의 피를 닦는다. 묘하게 겹쳐지는 피에타의 모습. 대학시절 육체의 가슴으로 그를 희롱하던 미쓰코는 차문다의 가슴으로 오쓰의 피를 닦았을 것이다.

환생한 자신을 찾아달라는 아내의 유언, 공기같은 아내의 존재가 병상에서 마지막 뱉어낸 그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결국에는 그렇게 되었건만 공기를 잃은 이소베의 가슴에 회한이 서린다. 허망한 끈마저 놓고나니 이소베는 아내의 의미, 가치를 깨닫는다. 

병원에서 유일한 위로였던 구관조가 자신의 위급한 수술 중에 죽었다. 자기 대신 죽어버린 거라고, 누마다는 구관조와 치환된 생명을 잊지 못한다. 바라나시 어딘가에서 산 구관조를 조류 보호구역으로 가 해방시켜준다. 

전쟁의 상흔을 갖고 사는 기구치는 친구가 동료의 인육을 먹고 그것을 자신에게도 나눠준 사실을 죽음을 앞둔 친구의 병실에서 듣는다. 전범들의 권력에 희생된 전우들을 위해 갠지스에서 기구치는 경을 외우며 죽음의 거리에서 들리던 죽여달라던 신음을 갠지스에 흘려보낸다. 






엔도 슈사쿠의 초창기 소설 <바다과 독약>, 마지막 장편인 <깊은 강>
작가의 나이, 시간이 이 소설에 그대로 묻어난다. 
물 흐르듯이 읽히면서도 눈 쌓이듯이 깊어지고 거기에 묻히며 잠들었던 일주일이었다.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터라 이 소설이 의미를 가진지도 모르겠다.
그의 다른 저작인 <침묵> 그 자체가 내 고민이기도 하고 마치 <침묵>을 무심히 바라보지만 포용하는 듯한 <깊은 강>에 어떤 의미를 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이 책에서 '신'의 의미를 굳이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도 슈사쿠는 실존과 상실, 허무의 시선을 사람과 자연을 향하게 한다. '양파(신)'에의 물음을 구하는 오쓰나 미쓰코조차 세상에 실존하는 종교와 종교를 좇아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의 의미를 향한다. 


'실존하는 것은 나이며, 무엇보다 나의 존재를 믿으면 깊은 강은 필요치 않다'며 이 책을 평한 사람의 글을 읽었다. 

단지 종교에 대한 논의에 한정해 이 책을 바라본다면 '삶의 고민, 각자의 인생이 그리는 드라마'를 놓치게 될 뿐이다. 그렇게 <깊은 강>이 필요치 않게 될 바에는 <데미안>도 환상의 인물이요, <전쟁과 평화>도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아래는 나가사키 엔도 슈사쿠 문학관의 한 코스에 적힌 엔도 슈사쿠의 문구라고 한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 '침묵의 비(碑)'



바다 앞에 선 엔도 슈사쿠의 묵상은 침통하면서도 무한한 푯대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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