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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Mar 31. 2016

노익장

193 



성대가 모래주머니가 된 것 마냥 사각거리는 가려움. 가려움을 긁어주니 가래다 나왔다. 뱉어내고 뱉어내는데도 뱉어내게 만들더니 어제오늘 열이 난다. 덕분에 주변인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았지만 그마음의 진실이 어떠한건지 절반은 포착했다. 아픈 사람이 나만 있었던건 아니니까.



하루를 일찍 마무리하고 찾아간 병원에서 만난 불친절한 간호사와 친절한 의사 선생님. 
오래된 인테리어, 간호사들의 시선에 맞춰진 텔레비전이 언제나 튀지만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고 진료는 탁월하다. 
"찬물만 조심하면 돼요." "커피는 어떤가요?" 
"커피는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혹시... 이석증도 진료하시나요." 
"이석증은 이비인후과죠." 
머리가 띵해서였는지 바보같은 질문. 아프면 바보가 되는건지, 아님 한번에 처리하고 싶어서였는지. 





병원 아래 약국. 약국의 창은 왜 모두 유리일까? 

서울대 약대를 나온 약사는 귀가 낡고 몸이 낡아 기억도 낡아버린 할머니 앞에서는 겸손하다. 
"아침에 한번에 드시는건데~ 두개로 나눠달라고 하셨잖아요~. 아침 식사 전에 한번, 식사 후에 한번, 그렇게 드시면 돼요."
할머니 옆의 덜 할머니가 약사를 거든다.
"한번에 두개 드셔도 돼요."
"한번에 두개 드셔도 돼요. 할머니가 나눠 달라고 하셨잖아요."

같은 말을 두어번 더 듣고나서야 할머니는 웃으면서 나간다. 

"한 다섯 번은 말씀 드렸는데, 저 분이 당뇨에 치매도 오셔가지고 같은 말을 여러번 하시네."
덕분에 기다린 손님에게 인사치레와 변명을 한번에 해결했다. 역시 서울대 약사.

나도 인사를 해야지.
"한번에 다 드시면 배불러서 그러실거에요."
약 한번에 물 한번 넘겨야 하는, 갈증도 잘 느끼지 않는 노인에게 약은 배부르다. 약사가 쥔 봉투를 보니 나도 약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 노인분들 물도 더부룩하죠. 맥스님, 3,300원이요."
"아, 네 고맙습니다."


겉도 속도 안 좋은 노인이 저 많은 약을 한번에 털어버리면 배가 부른 것은 사실이겠으나, 노인이 약국에서 까탈스럽게 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 아직 멀쩡해. 진짜 병든 노친네는 이렇게 까탈스럽지 않아."

 
성대에서 달랑거리는 모래주머니가 카랑대지 않았다면, 
할머니의 존엄을 한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골 할머니가 한두해 전 필요없다며 치워버린 핸드폰을 아버지가 새로 맞춰드렸다. 혹시 자녀들이 요양원에 넣어두고 연락도 끊어버린게 아니라는 걸. 호출하면 언제든 달려올 자식들이 여섯이나 있는데도 할머니는 보증서가 필요했다. 일생 꼿꼿하게 살아온, 손주들에게도 꼿꼿했던 할머니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메세지... 


"그게 나만 없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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