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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Jul 15. 2016

소설 읽기,
나선으로 들어가기

243 나선

원래 소설을 잘 읽지 않았다. 

점점이 이어지고 나선을 휘돌아 들어가야만 발견할 수 있는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찾는 것은 꽤나 지루한 일이었다. 정신과 시각의 노동.

그래서인지 작년까지의 책장은 인문서, 경제경영서 등의 직설적이고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한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문학이래봤자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 모인 단편집과 수필, 자서전이 주를 이뤘다. 특별히 장편소설이래봐야 그나마 팬심으로 읽었던 크리스티, 성석제, 김영하 작가의 작품과 지적생활에 자기위로로 사용된 이상문학상 수상집 정도. 



서너줄, 길어야 한장이면 요약되는 작품의 의미를 수백장을 뒤지며 얻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그리고 대작, 걸작이라는 작품들은 왜 그리들 심사가 뒤틀려있는지 자기소개가 초반부터 장황하다.



그래서 소설 읽기가 힘들었다.
뺑뺑이 돌리는것 같았으니.



그러다 이제사는 비문학보다는 문학에 보다 더 가깝고 문학에서도 소설에 무게를 둔 독록을 두게 됐다.



소설의 핵으로 가는 나선의 오솔길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기본지식이며 뺑뺑이 훈련은 기초체력이었다. 하나하나의 벽돌이 차근차근 쌓아올린 성벽이 견고하게 문학의 의미를 지탱했던 것이다.

조금씩 모아 산재했던 사건과 사실과 이름과 자갈이 한꺼번에 쏟아질때 새로운 세계가 등장했다. 


이를테면 <자기앞의 생>이 그러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의 무게와 역설적으로 그려 낸 인생의 비극이 덮치는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 한 문장의 의미를 위해서 그 앞선 모든 문장과 단어와 글자들이 씌어진 것이었다. 앞으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각인을 새겨졌다.



인생 그대로를 이은 소설 <바다여, 바다여>도, 아주 작은 초침의 순간마저 기록하려 했던 <게걸음으로>도, 세태를 지적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같은 소설도 길든 짧든 인생의 세계든 세상 그 자체든 그 무게와 의미를 그렇게 지어내어 내게 보여줬다. 

즐거움을 최우선하여 읽은 책들 중에서도 한계의 상황과 가장 빨갛고 가장 어두운 검은색을 찾기 위해 벽돌이든 칼날이든 페이지와 행간 속에 쌓아두고 숨겨놓은 작품들이 존재했다.


소설은 쓰기 어려운 책이다.
직설이 아닌 온갖 사건과 인물과 장치를 거쳐 써야하는데다 
종종 온갖 장신구를 갖추기도 누더기를 걸치기도 해야한다.


굉장한 철학자들이 위대한 소설을 쓰고
위대한 소설이 철학자와 심리학자, 공학자들의 영감이 된다.

그동안 소설을 소외시켰던 이유와 변명과 
그러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s.
물론 비문학 장르가 더 쓰기 쉽다거나
소설과 비교해 절하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장르의 구분은 목적과 이유가 분명히 있고, 
아직도 가장 주목하고 신작을 기다리는 작가의 직업이 소설가는 아니다. 소설 읽기, 나선으로 들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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