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잃을까 두려웠던, 나의 첫번째 싸움
생명의 탄생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비록 잊혀져가는 아이일지라도 그 안에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 이야기를 담기 위해 제각각의 발걸음을 한다. 나도 그 중의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가고 있다. 그리고 써보려고 한다. 나의 여정, 이제 걷기 시작한 단계일테지만.
그렇게 나는 향했다.
이 부근에서 가장 큰 산부인과.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쓴다. 출산율이 바닥이라는데 이 큰 건물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양쪽으로 진료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내 주위에도 없고, 흔한 길거리에도 없는 임산부들은 여기 다 모여있느라 그간 내가 못 봤나. 내가 앉아야할 자리를 찾아야할 만큼 문정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그 사이엔 빼곡히 앉을 수 있게 디자인된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다. 배가 부른 임산부가 기댈 수 있는 등받이. 그 위에는 각자의 인내심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곳에 앉아보니 나도 그 무게를 함께 품는 것 같았다.
진료를 제시간에 받는 건, 그야말로 ‘운’이었다. 출산이란 건 어느 순간,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오니까. 진료실 문마다 ‘수술 중’이라는 팻말이 걸렸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의사도, 간호사도, 환자도…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 풍경이다. 북적이는 대기실 한가운데,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제각각의 마음으로 기다린다.
출산율은 숫자일뿐 아이는 결국 '운’처럼 찾아온다. 그리고 운은, 예고 없이 우리를 데려다 앉힌다.
아이를 품은 자궁.
아이를 기다리는 자궁.
아이를 보낸 자궁.
아픈 자궁.
비워진 자궁.
그리고, 나의 자궁.
나는 그 어디쯤일까.
나의 자궁 말고, 나 말이야.
신이 준 축복이자, 때로는 저주 같은 것.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자궁.
임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신은 인간에게 불평등을 깨우치게 했다. 임신 계획과 준비, 그리고 임신을 확인하는 과정까지. 버진로드가 깔려 있는 것처럼 순탄한 이들도 있고, 버진로드를 깔아보려 했으나 그 다음 단계가 어려운 이들도 있다. 계획 없이 찾아와서 행복한 이들도 있고, 불행한 이들도 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불편한 마음과 마주하게 되는 곳도 있었다. 난임센터 앞이었다. 왜 같은 공간에 만들어놨을까. 그곳은 마치 온도차가 확연한 두 계절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같았다.
진료를 마친 나는 당연한 결과를 받아들였고 ‘당연히 쉬운 사람’ 중 하나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물론 예비 엄마들이 하는 걱정은 나도 했었다. “32살 출산은 생물학적으로 노산이에요.”라는 의사의 말에... 반항심과 걱정을 함께 품기도 했었다. 출산에 대한 걱정이었지, 임신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다. 출산 전까지의 임신 과정은 나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모든 게 당연하지 않았다.
입덧은 나에게 외로움의 시작을 알렸다. 그때 나는 신혼집인 경기 남부에서 역삼으로 출퇴근을 했었다. 버스와 지하철 모두 항상 만차였다. 그 대중교통 속에서 여태껏 맡아보지 못했던 역겨운 냄새들을 나노입자 단위로 맡기 시작했다. 입덧의 정점이었을 때는 물 냄새까지 비릿하게 느껴졌는데, 입덧에 대한 나의 불편함을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받지 못했던 날들은 훗날 <미우새> 안방 주인 할머니가 남자는 기분만 낸다는 말에 밑거름이 되어주었고 나도 함께 웃을 수 있는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입덧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서럽지만,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임신 12주 차에 회사에서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혈이 시작됐다. 상황만 간단히 알리고, 덤덤한 척 갔던 응급실. “괜찮다”는 말을 듣는 순간, 쏟아지는 눈물에 처음으로 ‘모성애’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후에는 시도 때도 없이 하혈했다. 몇 번의 응급실행과 몇 번의 절박유산 진단. 그때부터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은 점점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그 과정에서도 남편은 늘 여유로웠고 나는 늘 간절했다.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건 오롯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퇴사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절박유산 진단 후 두 번째 병가를 요청할 때쯤 일종의 책임감이 생겼다. 동료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애정과 애증이 가득한 이곳, 아쉽지만 이제는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출산을 4개월 앞두고 집에서 쉬게 되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부모님 가게 일을 도왔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다. 졸업하자마자부터도 쉼 없이 일했던 내가 갑자기 집에 있게 되자, 외면했던 나와 계속 마주하게 되었다. 태교라는 핑계로 뜨개질을 하며 피해봤지만, 내 안의 내가 나를 이따금씩 날카로운 바늘로 콕콕 찔렀고 나는 그때마다 도망갔다.
아이를 잃을까봐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내 안의 나는 말했다. 아이가 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생명의 축복은 과분하니 포기하고 네 삶을 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엄마였다. 어디선가, 근원적인 힘이 흘러나왔다. 포기하는 데에 익숙했던 나는 이번만큼은 지지 않았다. 끝내 나는 이겨냈고 내 아이와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