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처럼 퇴근하던 나날들

누구에게도 말 못한, 나의 퇴근길

by 진서

똑딱똑딱.

퇴근 30분전, 집중해서 업무의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끝내야한다. 다시 해야하는 일이 있으면 절대 안된다. 예상하시 못한 업무가 갑자기 생기지 않길 바래본다.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치 그 시계 바늘 한칸마다의 움직임이 몸으로 느껴지는 듯 하다. 이미 마친 업무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조급한 마음을 들키는게 싫어서 퇴근시간이 되면 여유있는 몸짓으로 인사하고 걸어나온다. 회사를 걸어나오는 나를 생각하면 마치 유주얼서스펙트의 엔딩장면같기도 하다. 비록 절름발이는 아니지만 여유있는 발걸음에서 진짜 나를 찾아가며 천천히 속력을 올린다.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걷는다.


회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은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출퇴근 편도시간이 30분도 걸리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한시간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 나오는 길에서부터 버스와 지하철 시간을 확인했다. 가장 빠른 대중교통을 먼저 확인하고 뛰듯 걸었다.


대중교통에서 가장 싫어했던 유형이 바로 나였다. 꽉 찬 대중교통에서도 나까지만은 가능하도록 밀어서 탔다. 이제와서 이야기지만 과거에 밀어서 타던 그분들을 증오했던 나의 편협한 마음을 반성한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진짜 이해가 안 되던 일도 언젠가는 이해될 수도 있으니 모든 일에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봐야겠다. 제 시간에 오는 지하철은 매번 늦는것처럼 느껴졌고 버스전용도로를 달리는 버스도 매번 막히는 것처럼 마음이 답답했다.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기 전까지 마음이 늘 초조했다. 돌이 갓지난 아이를 아침일찍 맡기고 늦은 시간에 데리러 갔다. 그래도 내가 일을 함으로써 경제적인 여유가 생겨서 아이에게 더 해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야근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를 급하게 데리러 갔다. 머피의 법칙처럼 이런 날은 남편도 평소보다 더 늦는다. 도착했을땐 저녁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아이를 꼭 안았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급하게 와서 숨쉴 틈도 없었다. 숨을 고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배고팠지?" 라고 물었다. "네" 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눈물이 터져버렸다. 언제 말을 배워서 대답도 하는지. 이왕 대답해줄거면 내가 엄마인데 "응"이라고 대답해주지. 이렇게 작은 입이, 이렇게 정확하게 대답하다니. 그게 더 아팠다. 아기였다. 아이를 향한 미안함에 사랑도 불어터져버렸다.


일주일에 2번은 1시간반 거리에 계시는 시부모님이 오셔서 아이를 봐주셨다. 시누네 조카도 내 아이와 동갑이었고 같은 맞벌이 가정이었다. 덕분에 시부모님은 몇 달간은 매일 동쪽서쪽으로 1시간이 넘게 달리셨다. 너무 죄송했다.


결혼 전부터 시부모님께서는 기력있을 때 낳으면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약속을 지키시는 거라 생각했지만, 고생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시부모님이 오시는 날은 퇴근시간에 틈새사수요원이 되지 않아도 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이었다. 밥을 먹으며 돌아보면 아침에는 분명 난장판이었던 냉장고도 거실도 방도 다 깨끗해져있었다. 그래도 내가 제일 힘들거라고 하셨다. 그냥 앉아서 밥만 먹으라고 하셨다. 설거지도 하지말라고 하셨다. 시부모님의 헌신적인 모습에 놀라고 감동했었다. 감사함이 쌓이는 만큼 시부모님의 얼굴은 점점 야위가셨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반대로 나의 부모님은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분들이었다. 자라오면서도 늘 도와줄게 없다고 생각하셨기에 그 기대에 맞춰서 결과만 말해왔었다. 결혼 후에도 부모님 관계에 변화는 없었다. 시부모님은 야위어가시는데 내 부모님께 말씀 안드리기는게 남편한테 미안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가끔 부탁했다. 부모님이 내 부탁을 들어주실 때는 정말 너무나 죄송하고 황송했다. 결국 양가의 도움이 감사함이 아니라 죄스러움처럼 느껴졌다. 내가 마치 죄인처럼 느껴졌다.


결국 몇 달 후, 회사와 조율해 퇴근 시간을 앞당겼고, 시부모님의 도움은 받지 않기로 했다.

이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많이 아쉬웠다.

그 따뜻한 밥. 이제 자주 못 먹겠다고.


일주일에 한두번정도는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받았다. 정말 사랑이 가득한 선생님이셨다. 아이의 하루를 통째로 들려주셨다. 저녁에 잠깐 보는 것으로는 알 수 없던 아이의 성장 이야기였다. 아이가 어떤 반찬을 잘먹는지, 오늘 어떤 활동을 했는데 어떤 말을 했었는지.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그 통화를 마치면 친구와 통화한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집에서 아이를 보는데 어려운 점도 선생님께 여쭤봤다. 어쩌면 나보다 내 아이를 더 잘 아시는 선생님은 척척박사셨다.


어느날 아이의 컨디션이 약간 떨어져보이는 날이 있었다. 그래도 잘 놀아서 걱정없이 놀리고 있었는데 자기전에 알 수 없는 이상한 직감에 열을 재봤다. 세상에 39도 아닌가. 병원에 다녀오고 목감기 진단을 받았다.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나보다 엄마같이 말씀하셨다. "어머니 재인이 열나기 시작하면 컨디션이 묘하게 달라져요. 몸만 만져보셨으면 후끈해서 아셨을텐데요!!!"정말 많이 배웠다. 내 아이인데 어린이집에서, 시부모님께서 다 키워주시는 것 같았다.


내 아이는 정말 착했다. 다른 엄마들이 "우리 애는 울고, 떼쓰고, 미치겠다."고 할때,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내 아이는 하지말라면 안했다. 자라면 자고 먹으라면 먹었다. 엄마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를 할때면 동감해주며 "나도 힘들어. 이런저런 일이 있었거든"이라고 동조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본인들의 이야기에 이해를 못하는 눈빛이라며 내 아이라면 10명을 낳았겠다고 순해서 부럽다고 했다. 그 아이를 키우는 나는 마치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엄마처럼 느껴졌다. 내가 순진했다. 쉽게 생각했다.


그러다 아이가 4살이 되었을 때, 코로나가 터졌다. 확진자 동선을 뉴스로 보았고 곧 우리 동네에도 번졌다. 불안감은 그 어떤 바이러스보다 컸다. 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축소해서 운영했다. 내가 다니던 원에서는 가정보육을 권장했다. 그렇지만 출퇴근을 계속 해야했던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마스크를 채우고 어린이집에 보냈다. 집에 오면 바로 씻겼다.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서는 매일 코로나 검사를 해야했다. 아침마다 아이의 콧구멍을 쑤셨다. 선생님들도, 나도 모두 예민했고 조심스러웠다.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어느날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어린이집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 곳은 복도식 아파트여서 베란다문과 현관문을 열어두면 맞바람이 쳤다. 가을이었고 추웠다. 아이 상황을 빨리 확인해보고 싶어서 걸음을 더 재촉했다. 어린이집으로 가서보니 매서운 바람 사이에 작은 텐트가 있었다. 그 안에는 남아있는 아이 둘이 있었다. 그 중에 내 아이가 있었다. 코로나때문에 매일 방역하셔야 했다. 환기도 해야했다. 선생님들이 하신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미웠고 아이에게 엄마인 내가 죄스러웠다.


회사에 다니는 워킹맘이 된 후로 나는 남편과 지겹게 싸웠다. 매일 싸웠다. 아침 저녁으로 얼굴만 마주치면 싸웠다. 싸울 이유는 늘 충분했다. 차고 넘쳤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아이 등원, 아이 하원, 저녁밥, 화장실 청소, 설거지, 빨래... 둘 다 체력이 부족했다. 나중엔 싸울 체력도 모자랐다. 싸울 이유는 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로를 인정했다. 인정을 가장한 포기였다. 그게 서로에게 편했다. 서로의 선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쉴틈없이 고갈된 체력으로 전쟁같은 일상을 살아가다보니 남편이 전우같기도 했고 혼자만 쉬는 모습을 보는 날에는 마치 적군같아서 또 싸우고 싶어졌다.


결국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텐트 속에서 나오던 아이를 보며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나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는 죄인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너무 오래 미안해하며 살아온 엄마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