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괜찮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날들에 대해
유명한 브랜드의 예쁜 옷.
책장을 가득 채울 전집과 교구.
물놀이하기 좋은 해외여행.
뭐든 다 해주고 싶었다.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한테 해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은 돈이 필요했다. 뱃속 아기를 위해 퇴사했었는데 이제는 배 밖 아기를 위해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하며 직장 생활하며 누렸던 사치는 꿈에도 꾸지 않았다. 아이 생각만 하며 아이에게만 돈을 써도 계속 모자랐다. 세상에 예쁜 옷과 신발, 액세서리가 얼마나 많은지. 딸이어서 욕심도 더 많이 났다. 출산 전에는 아이가 쓰던 물건을 물려주는 문화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정말 소중하고 고마웠다. 보풀 많고 해진 옷도 어딘가에 다 한 번쯤이라도 쓸 떼가 있었다.
맞벌이가 꼭 필요한 가정도 있다. 맞벌이 가정이 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남편과 내가 맞벌이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 돈 때문이었다. 아이를 볼 때는 돈만 더 여유 있으면 다 괜찮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회사에 다니는 엄마가 되고 보니 회사 생활도, 아이 양육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불만족감과 죄책감에 마음이 불편했다. 누구는 아이는 알아서 잘 큰다고 하던데. 이런 이야기는 늘 남의 이야기다.
또다시 결심한 퇴사를 했을 때는 다른 이점도 있었다. 아이가 아파도 마음 편히 집에 있을 수 있었다. 직장 다닐 때는 감기약을 달고 살았는데 아이도 덜 피곤한지 잘 아프지도 않았다. 비록 코로나로 바깥 활동은 어렵지만 집 안에서 아이에게 해주고 싶었던 요리, 놀이, 이야기 다 해줬다. 내일의 일정을 미리 계획하지 않아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언제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함을 몸소 깨닫는 시기였다. 돈도 필요하지만 사랑도 필요했다. 어쩌면 엄마의 사랑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퇴사와 함께 그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모았던 돈으로 기술을 배워보기로 결정했다. 어른들 말씀에 기술이 최고라고. 나도 그게 진리라고 생각 됐다. 고심 끝에 결정한 그 기술은 미용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나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역시 사람에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확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든 남이든 믿지 않는 것도 진리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미용 기술 중에서도 반영구를 선택했었다. 반영구 눈썹 한 명에 10만 원대가 그 당시 시세였다. 한 달에 10명만 해도 꽤 괜찮은 금액이었다. 하루에 3명씩 30일만 일한다고 계산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탐나는 기술이었다. 배우기만 하면 월 천만 원은 기본일 줄 알았다. 하루에 단 몇 시간만 일해도 월수입이 천만 원이 기본으로 계산되는 월천 미용 기술이 반영구라고 계산했다.
나는 퇴사와 새로운 시작을 함께 계획했고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갔다. 퇴사의 해방감에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배우는 설렘과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남편과 아이가 잠이 들면 조용히 침실에서 나왔다. 작은 방으로 가서 아이와 함께하느라 못다 한 공부를 했다. 유튜브, 인스타로 해외 자료들까지도 싹 다 찾아봤다. 밤마다 앞으로의 계획을 적어내려 갔다. 도전에 실패하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되겠다고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나는 멋진 슈퍼 엄마로 살아갈 모습을 상상했다. 내일의 걱정보다 오늘의 즐거움이 더 컸다. 간절했고 당연했다. 문득 찾아오는 불안함 따위는 쉽게 이겨냈다.
반영구 수업에는 크게 이론 수업과 데모 연습으로 나뉜다. 두세 달간의 이론 수업이 끝나고 데모 연습 기간이 되었다. 데모는 보통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들이 해주기 마련이다. 마음 편한 상대인 것이 좋기도 하고 시술자의 실수에도 너그러이 받아 줄 수 있어야 하기에. 여동생이 나의 첫 데모상대가 되어주었다. 약간의 피가 났고 동생이 아파 보였다. 두 눈을 꼭 감은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두 번째 데모는 친한 친구였는데 친구도 동생처럼 두 눈을 꼭 감고 아픔을 참았다.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는 게 무섭고 싫었다. 동생도 친구도 예뻐지려면 참아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괜찮다고 위로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이 기술로 천만 원을 꼭 벌고 싶었다. 그리고 학원비만 해도 몇백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반영구 학원에서 속눈썹 펌 수강을 했다. 반영구를 하면서 서비스로 속눈썹 펌을 해주면 단골손님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꼭 배워야 하는 기술이라고 해서 배웠다. 속눈썹 펌을 배운 첫날에 아는 동생에게 데모까지 했다. 그 동생의 눈은 유난히도 예뻤다. 데모하면서 양쪽 눈에 사용하는 롯드를 짝짝이로 쓰는 실수를 했지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너무 마음에 들고 예쁘다고. 언니인 내가 정말 잘되길 바라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동생의 응원도 있었지만 예뻐지는 눈을 보며 반영구와 다르게 재밌다고 생각이 들었다. 고통이 없이도 예뻐질 수 있다는 건 나에게도 필요한 위로였다. 수익보다는 내가 마음 편하게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속눈썹 기술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한가닥씩 길고 풍성하게 가모를 한가닥씩 붙여주는 속눈썹 연장, 그리고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눈썹 자체의 모양을 바꿔주는 속눈썹 펌이 있다. 그중에서 나는 속눈썹펌이 특히나 재미있었다. 먼저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눈매를 분석하고 목표를 함께 공유하고 시술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 확인을 받는다. 그리고 아이패치를 붙이고 테이핑을 한다. 눈에 맞는 롯드도 붙인다. 속눈썹 모와 펌제와 사투를 벌이고 나면 예쁜 눈이 짠하고 완성된다. 그리고 고객님에게 거울을 드리고 만족도를 확인한다. 고객님이 좋아하시는 순간보다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오답노트를 만들어서 기술을 수정해 나갔다. 그렇게 계속 공부했다. 꿈속에서도 계속 작업했다. 하루하루 채워나가 보니 샵 한편에 있는 베드를 대여하기 시작했다. 예약을 한두 건씩 받았다. 그다음은 샵인샵을 계약했다. 샵의 문화를 배우며 기술을 연마해 나갔다. 어느 정도 예약에 안정이 찾아오고 손에 익고 자신감이 붙을 무렵, 나는 아이와 함께 있어도 괜찮을만한 내 샵을 계약하기까지 이르렀다.
내 인생에 처음 생기는 내 공간이었다. 건물 꼭대기층이었다. 꼭대기 중에서도 구석이었다. 한쪽 면의 반이상이 창이었다. 햇살이 아주 밝게 들어왔다. 꼭대기의 구석이어도 밝았다. 그 밝은 내 첫 샵을 남편과 아이가 함께 준비했다. 까만 가벽하나를 남편이 하얗게 페인트칠을 했고 아이도 도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났다. 내가 받은 이 행복, 자리를 잘 잡아서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의 유치원 입학과 나의 샵 인생 시작이 바쁘게 흘러갔다.
유치원 입학 1년이 지나고 새로운 6살 반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양가 어머니들께서 나에게 넌지시 조언을 해주셨다.
"재인이 과잉보호하지 말고 키워라"라는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머니들의 말씀대로 씩씩하게 키워보자고 다짐을 하고 그런 엄마가 돼보려고 했다.
6살 반이 시작되고는 5살처럼 부끄러움은 많지만 비슷하게 적응해 간다고 생각했다.
5살처럼 6살에도 오전 9시에 유치원 노란 버스로 등원하고 오후 4시 반쯤 하원했다.
늘 해왔던 스케줄대로 놀이터에 갔다.
3월 입학하면서부터 아이가 소변을 종일 참고 하원했다.
처음엔 한 달이면 좋아지겠거니 했다. 새 학기증후군이려니 했다.
4월부터는 등원버스를 거부했고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아침에는 매일 울었다.
이후에는 담임선생님께 오는 전화는 매번 가슴을 후벼 팠다.
점심식사 시간에는 선생님의 "밥 먹어" "국 먹어" "김 먹어"라고 지시해야 먹었고
유치원 활동시간에는 선생님이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아이를 달래기도 했다. 협박도 했다. 화도 냈다. 울어도 봤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씩씩하게 키워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나를 달래는 건지. 아이를 달래는 건지. 아무튼 계속 달래 봤다.
5월이 되니 선생님이 밀착케어해줘야 하는
내 아이는 '특별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선생님께 아무래도 아이가 걱정이 되어서 상담을 가봐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제 얘기에 귀 기울여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병원에 가셔서 진료 잘 받기를 바랄게요. 필요하시면 같이 알아봐 드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혹시 치료 중에 유치원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나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나는 상담 센터정도 알아보고 있었는데 병원이라고 한다. 치료라고 한다.
내 판단이 잘못 됐음을 그제야 알았다.
씩씩해지려는 내 마음이,
아이의 작은 신호들을 놓치게 만들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