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필요한 엄마

사랑을 배우는 일은 아이를 품는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by 진서

꿈속에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낯익은 골목을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불그스름하게 번져가던 하굣길. 가끔 스트레스를 풀 때 갔었던 노래방으로 향하는 길 같았다. 코너를 막 돌아설 즈음, 가슴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 나 수유하러 가야 해.”


그리고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보니, 가슴은 단단하게 뭉쳐 있었고 무거웠다. 수유할 시간이 온 것이다.


수유를 하며 다시 꿈을 되짚었다. 다시 그 꿈으로 간다면, 우리는 또 발라드로 시작해 소찬휘의 ‘Tears’로 끝냈을 거다. 10분씩, 5분씩… 노래방 사장님이 시간을 더 넣어주시고 결국 1시간 넘게 보너스를 받고는 지칠 줄 모르고 더 놀았겠지.


노래보다 더 뜨거웠던, 그 시절의 우리.




내 얼굴을 보는 잠깐의 시간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존엄을 지키는 것이었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 것은 그 최소한이었다. 아기를 만나기 전날까지만 해도 선크림에 틴트정도는 임산부로도 죄책 감 없이 가볍게 할 수 있었는데 출산하는 날부터는 얼굴에 바르는 것은 세상에 로션이 전부인 것처럼 아침을 시작하게 되었다.

더 이상 꾸미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편한 게 최고인 사람.

겉모습보다는 가정을,

나를 위한 음식과 잠까지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내 모습을 아줌마라고 칭했다. 그게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이렇게 나이 먹고 할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예쁘고 싶다는 작은 꿈을 꾸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날씬하고 예쁜 친구들을 만나면 나의 불만족스러운 모습을 광고라도 하듯이 결혼도 임신도 하지 말라고 했다. 아가씨들을 보며 예뻐하고 좋을 때라고 그리워하는 진짜 어머니이자 아줌마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슬퍼할 틈도 없었다.

슬픔이 몰려올 때면

나의 소중한 아기가 나를 필요로 했다.

내 한 몸,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사랑이었다.



나는 아픔을 잘 참는 편이다.

그런데도 출산 당일의 기억은 파편처럼 남아있다.

옆에서 울며 기도하던 엄마,

동동거리던 남편,

가끔씩 와서 상태를 체크해 주던 간호사 선생님들.


누군가 말했다.

출산은 수박이 골반에 껴 있다가 나오는 고통이라고.

정말 그랬다. 있어서는 안 될 수박이 내 골반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내 배 위에 올라타 눌렀고,

“아기를 생각하셔야 해요!”라고 했고

포기할까도 했지만,

잠깐 스쳤을 뿐인 생각이었다.

결국, 나는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첫 만남에, 나는 말했다.

“(빨리 좀 나오지… ) 너 왜 그랬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드라마 속 장면처럼 “내 아가야…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워” 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감격스러워는 첫 만남일 줄 알았는데. 후회란 꼭 중요한 순간에만 찾아온다. 후회의 크기에 상관없이, 그 후회가 시작되면 망각은 어려워진다. 잊은 듯해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다.



소중한 나의 아기는 정말 예뻤다.

예쁘지 않아도, 예뻤다.

꼭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아기를 보는 첫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출산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했지만, 다리를 질질 끌며 신생아실 수유 시간을 꼭 지켜가는 모습에 간호사 선생님들께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보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천국이라 불리던 조리원. 나와 보니, 정말 그곳이 천국이었다는 걸 알았다. 조리원이 끝나면 엄마가 산후조리를 해주겠다고 엄마의 집으로 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같이 살았던 때가 결혼 전보다도 훨씬 더 몇 년 전이었다. 엄마의 집은 내가 초대받은 방문자처럼 느껴지는 낯선 공간이었다. 산후조리를 위해 엄마의 집에 간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너무 불편한 일이었다. 나는 산후도우미를 신청했고, 엄마에게 “오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다. 누구에게도 신세 지고 싶지 않았고,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집으로 온 첫날, 엄마가 왔었다.

그리고 다음 날 동이 뜬 후에,

폭우가 내리는 아침 일찍이 돌아갔다.

현관문 넘어로 보이는 바깥은 안개로 가득했다. 빗소리도 세찼다.

떠나야만 했던 엄마. 떠난 엄마. 홀로 남은 나.


정 많은, 노련한 산후도우미 선생님이 곁에 있었지만,

나는 눈물이 났다.

엄마가 필요했다.


남편과의 결혼을 간절히 꿈꿨었다.

남편을 사랑했고,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결혼이라는 틀로 이 관계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결혼을 통해

원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나만의 가정을 만들면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다.

원가족의 아픈 이야기들은

이젠 남일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은

그 아픔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

피할 수 없었고,

빗겨 나기도 어려웠다.


그때 내가 이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남편 탓을 하는 것이었다.

쉽고 빠른 분노였지만,

그만큼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아플수록 나는 더 집착했다.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보다 더 주고 싶었다.

내 마음보다 넘치게 사랑해 줘야 마음이 편했다.

내 몸이 아파도 다 해주고 싶었다.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 그거 다 내 아이에게 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아이에게,

그리고 아주 조금은 나에게 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