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봉, 동서남북으로 넘나들던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63)

by 이무완

동해 시내 어디서든 봉우리가 보이는 초록봉은 531미터로, 한 시간 남짓이면 오른다. 서쪽은 4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 많지만 동쪽으로는 크게 낮아져 80미터 안팎으로 느릿한 비탈을 이룬다. 어릴 적 “초록의 맑은 얼이 한데 모인 곳”이라는 대목이 교가에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면 다 초록산일 텐데, 어째서 ‘초록봉’일까 하고 미심쩍었다.

봉우리가 푸르러 초록봉

1910년대에 나온 ≪조선지지자료≫ 삼척군 도상면에 ‘초록당’이란 이름으로 나오고, ≪조선지형도≫(1917)에는 ‘초록산’으로 나온다. 이전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동해시 지명지≫(2017)에 나온 땅이름 유래를 보자.

아주 오랜 옛날, 사람 사는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 하느님이 이를 걱정하다가 마침내 장수를 내려보내 인간 세상을 바로잡으라고 한다. 장수는 그 명을 받들어 인간 세상을 바로잡고 다시 하늘로 뛰어오르는데, 이때 장수가 딛고 뛰어오른 바위가 ‘벼락바위’고 다른 발로 디딘 바위는 ‘장수바위’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 바위에 와서 치성을 드렸다고 해서 달리 ‘칠성바위’라고 한다. 바로 아래 집이 몇 있어서 ‘초록치(草綠峙), 초록동(草綠洞)이라 했지만 지금은 사람도 집도 없다. 또 초록당(草綠堂)이라는 당집이 있어서 초록당산이나 초록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내 보기에 ‘초록봉’이라는 이름은 초록당(당집)이나 초록동(마을)에서 따왔다기보다 오히려 초록치나 초록봉, 초록산에서 초록당, 초록동 같은 땅이름이 생겨났다고 보는 해석이 한결 자연스럽다.

초록봉 정상 표지비

새, 풀이 되다

땅이름에 나타나는 초(草) 자는 풀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땅 모양이나 상태, 역사, 옛 기록을 두루 살펴야 한다. 풀 초 자를 썼지만 속내를 톺아보면 풀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땅이름에서 풀 초 자는 볏과 식물인 억새나 띠를 싸잡아 가리키는 새(草)를 뜻하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새’(鳥)나 사이의 준말인 ‘새’(間)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 새것을 뜻하는 ‘새’(新)와 동쪽이나 해를 뜻하는 ‘새’(東․日)로 둔갑하는 일도 적지 않다.

문경시와 괴산군을 잇는 ‘문경새재’가 있다. ‘새재’라는 이름을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억새와 같은 볏과에 속하는 가 많이 자라는 재라서, 도 쉬었다 넘나드는 높은 재라서, 또 경상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재라서 ‘새재’라고 했다고 한다. ≪세종실록≫(150권,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문경현)에 보면, “넘나들기 어려운 곳이 셋이니 하나는 초점(草岾)으로 현 서쪽 19리에 있다. 충청도 충주(忠州)로 가는 길로 7리쯤이 험하다.” 고 적었다. ‘초점’(草岾)을 곧이곧대로 뒤치면 ‘풀고개’다. ‘점’(岾)은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쓴 한자로 ‘고개 재’, ‘땅이름 점’으로 새긴다. 새재의 ‘새’를 ‘풀’로 해석하자는 사람들은 문경새재 들머리에 있는 마을이 초리(草里)요 마을 앞 개울 이름이 초곡천(草谷川)이요 제1관문에 있는 성을 초곡성(草谷城)이라고 하니 ‘초점’(草岾)도 ‘풀고개’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면 ‘초록(草綠, 草麓)’의 ‘초’는 무엇으로 풀어야 할까.

≪조선지형도≫(1917) 초록산 아래 초록촌이 보인다. 노란색으로 칠한 점선은 걸어서 다니던 길을 나타낸다.

사잇길이 지나는 고개, 초록치

지금이야 차를 타고 초록봉을 휘돌아 다니지만 걸어서 다닐 때 초록봉은 동해시 동서남북 어디로든 질러가는 잿마루다. ≪조선지형도≫(1917)를 보면 초록촌은 서쪽과 동쪽을 가로지르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에 있는 마을이다. 동서 방향인 신흥/달방-초록촌-용정-천곡-평릉, 남북 방향인 삼화/이도-초록촌-승지동-괴란/만우를 잇는다. 이곳과 저곳을 질러가는 사잇길이 지나는 고개로 볼 수 있다. ‘사이(새)’를 풀(草)로 보고 어설프게 뒤치면 ‘초로(草路)’가 된다. 한편, 어느 곳에서나 한 시간 남짓이면 오르던 곳이니 나무하러 다니면서 생겨난 좁다란 ‘나뭇길’로 보아 ‘초로(樵路)’로 보았을 수도 있다.

혼자 생각이지만, 이들 ‘초로’와 ‘재’를 뜻하는 ‘치(峙)’를 붙여 ‘초로치’라는 이름을 지어 쓰다가 ‘초록’이라는 말에 이끌리면서 ‘초록치’란 고개 이름이 맨 먼저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다. 에이, 설마 하겠지만 소리 바꿈은 땅이름에서는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조선지형도≫에 보면, 초록산은 푸를 록(綠) 자를 쓰고, 초록동은 묏기슭 록(麓) 자로 적었다. ‘록’을 한자 뜻이 아니라 한자 소리로 받아적었기 때문이리라. 초록치를 바탕말로 삼아, 초록치에 있는 마을이라서 ‘초록동’, 초록동에 있는 당집이라서 ‘초록당’, 초록당이 있는 산이라서 ‘초록당산’, 그리고 초록치에 있는 봉우리라서 ‘초록봉’이란 땅이름을 차례로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어쨌든 ‘초록’이 무엇에서 말미암은 말인지 기록이 없으니 한자말에서 본디 말이 무엇인지 더듬어갈 수밖에 없다. 땅이름이 하루아침에 뚝딱 생겨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초록치든 초록산이든 초록봉이든 그보다 앞서 조상들이 쓰던 배달말이 있었으리라. 다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조선총독부는 이 땅을 식민지로 삼을 요량으로 ≪조선지형도≫(1917)를 만들면서 한글이 아닌 한자로 받아적다 보니 이 꼴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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