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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에서 길을 잃다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46) 미로, 미노리, 미근늘다리

by 이무완

미노에서 미로로

삼척시내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미로면이다. 한글로만 읽으면 내남없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길어 어지럽게 갈려서 한번 들어가면 웬만해선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자를 찾아보면, 아닐 미(未) 자, 늙을 로(老) 자다. 마을 이름이니 ‘늙지 아니하는 마을’이라고 풀어야 하나 싶다.


미로는 어떻게 생겨난 땅이름일까.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쓴 ≪척주지≫(1662)를 보면 ‘미노리(眉老里)’라고 했고, 1759년 ≪여지도서≫(1759)에 ‘미로리(未老里)’라고 했다. ‘미노리’ 할 때 ‘미’가 허목의 호에 든 글자라서 ‘아닐 미(未)’로 고쳤다는 말이 전하는데 썩 믿을 만한 말은 아니다. 허목은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스스로 호를 ‘미수(眉叟)’라고 했다. ‘미로’라는 땅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삼척군지≫(심의승, 1916) 설명은 이렇다.


미로는 ‘미-느리’라고 부르는 속음(俗音)이 있고 보면 이것은 아마 오십천 다리를 나무판대기 한 개씩을 연결하여 길게 가설한 곳이 여러 곳에 있으므로 ‘미-근・늘・다리’(連回板橋라는뜻)라고 불리우는 것을 한자음으로 미로리(眉老里)라고 쓴 것으로 보고, 이와 함께 오십천(五十川)을 여러 번 건너 다니게 되므로 ‘미근・늘창・나드리’(連回屢度의 뜻)라고 불리던 것이 와전되었다.


나 같은 어리보기는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한자 뜻에 기대지 말고 [미로], [미노]라는 소리로만 생각해 보자.


미는 물이다

옛 삼국 시대엔 배달말을 받아적을 한글이 없었다. 자연히 한자를 빌려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사람들은 ‘물(水)’을 어떻게 적었을까. 기록을 살펴보면 ‘물(勿)’을 비롯해서 ‘매(買), 미(彌), 마(馬), 잉리(仍利)’, ‘몰(沒)’ 같은 한자를 빌려 적었다. 이는 땅이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자.


소성현(邵城縣)은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인주(仁州)이다. 경원이라도 하며, 매소(買召)는 미추(彌鄒)라 하기도 한다. (권 제35잡지 제4)


매홀(買忽)을 수성(水城)이라고 한다. (권 제37잡지 제6)


‘매소홀, 미추홀’은 오늘날 인천이다. ‘추(鄒)’와 ‘소(召)’는 별 뜻 없이 사이시옷 정도로 넣은 말로 본다. ‘매홀(買忽)’은 수원이다. 뒤엣말 ‘홀’은 고구려말인데 오늘날 우리는 [홀] 하고 읽지만, 고구려 때는 [골] 비슷하게 소리냈으리라 짐작한다. 다시 말해 고구려 때 ‘홀’은 [고루/구루]에 가깝게 소리났을 수 있다. ‘홀’은 ‘고을(골)’이요 ‘성’이요 ‘마을’을 말한다. 일상에서 쓰는 말인 ‘미나리, 미더덕’ 할 때 앞가지 ‘미’도 ‘물’을 뜻한다. 그러니 앞에서 든 매홀, 매(소)홀, 미(추)홀 모두 ‘물고을’이다.


로/노는 땅이다

이제 뒤엣말 ‘로(老)’를 톺아보자. 옛 땅이름을 보면 글자는 달라도 뜻은 어금지금한 말들이 제법 있다. 가령, 고구려말에서 ‘내(內), 노(奴), 뇌(惱)’와 신라·백제말에서 ‘로(盧), 라(羅)’라는 끝소리는 모두 고을, 나라, 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황양현은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풍양현이다. (원문: 荒壤縣, 夲髙句麗骨衣奴縣, 景徳王改名. 今豐壤권 제35잡지 제4)


흑양군(황양군이라도 한다)은 본래 고구려 금물노군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진주다. (원문: 黒壤一云黄壤郡, 本髙句麗今勿奴郡, 景徳王改名. 今鎭州. 권 제35잡지 제4)


곡양현은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바꿨다. 지금은 검주다.(원문: 糓壤縣, 本髙句麗仍伐奴縣, 景徳王改名. 今黔州. 권 제35잡지 제4)


잉근내군(仍斤內郡), 골의내현(骨衣內縣) (권 제37잡지 제6)


금물노와 금물내, 골의노와 골의내, 잉벌노와 잉벌내와 잉근내 같은 땅이름에서 보듯 ‘○○노’, ‘○○내’라는 땅이름을 경덕왕 때 ‘○양’으로 바꿨다. 양(壤)은 땅이요 고을로, 뒤집어 말하면 ‘노(로), 내, 뇌, 나(라)’라는 한자는 고을, 나라, 땅을 뜻하는 말이다.


물이 흔한 곳, 물의 나라

내 보기에 ‘미노’나 ‘미로’를 옛말에 기대어 해석해 보면 ‘물의 땅’, ‘물의 나라’다. ≪조선지형도≫(1917)를 보라. 미로리는 두타산과 댓재, 솔모산, 근산, 육백산이 미로면 주위를 둘러싼 곳이라 골짝 골짝에서 시냇물이 내려와 오십천을 이뤄 굽이굽이 북으로 흘러간다. 그야말로 물 많은 데라서 '미로'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겠다.

미로.png 골골에서 흘러온 실개천이 모여 오십천을 이루어 미로를 지나 동해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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