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와 미로, 여의도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47) 나비, 너비, 이로, 미로, 여의도

by 이무완

'이로'는 과연 어떤 땅을 말하는가

동해시에 ‘이로’라는 땅이름이 있다. ‘이로’라고 할 때 이(泥)는 퇴적암의 하나인 ‘이암’을 쓸 때 쓴 진흙 니 자다. ‘로(老)’는 늙을 로 자다. 뜻 새김으로나 소리로나 도대체 무엇을 특징으로 잡아 지은 땅이름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동해시 지명지≫(2017)를 보자.


이로동은 예전에 한자로 未老(미로) 또는 鯉老(리로)로 적혔었는데, 이 마을에 상서로운 거북이 진흙 속에 묻혀 있는 형국인 서구몰니형(瑞龜沒泥形)의 명당이 있다 하여 泥老(니로)로 이름하였다고 전하며, 현재 이로동으로 통칭하고 있다.


내가 어리보기인 탓이겠지만 읽고도 도대체 뭔 말인지 어리둥절하다. 생각난 김에 ≪삼척군지≫와 ≪진주지≫ 설명도 차례로 살펴보았다.


본 동리는 맨 처음에 미로동(未老洞)이었는데, 이로동(利老洞)이 되었다가 근년에 니로리라 부르게 되었다.(삼척군지)


이로리(泥老里)는 예전에 미로(未老), 이로(鯉老)라고 불렀으나 병진년(1916)에 홍월(紅月), 동막(東幕), 죽림(竹林), 소비천(小飛川), 노비음(鷺飛陰), 매천(梅川), 원통(原通), 초록치(草綠峙)의 8개 마을을 합하여 이로리로 하였다.(진주지)


애초 ‘미로(未老)/이로(鯉老)’였는데 ‘이로(利老․二老)’가 되었다가 ‘니로(泥老)’로 되었다는 설명으로, 여전히 무슨 까닭에서 붙인 이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옛날 지체 높고 유식한 양반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백성들이 쓰는 말은 시시껄렁한 말이라고 낮잡고 자기들 입맛대로 한자를 덧대어 뜻을 덧칠한 탓이 크다.

이로동.jpg ≪조선지형도≫의 '이로리'와 항공사진으로 본 '이로동'


‘이로’의 옛 이름 ‘미로’

물론 배달말을 받아적을 글자가 없던 때니 별 도리 없이 한자를 쓸 수밖에 없다. 더욱이 말은 바위처럼 굳은 채로 가만히 있지 않고 소리든 뜻이든 흐르는 물처럼 쉬지 않고 바꾼다. 그게 거스를 수 없는 입말의 길인데 그 길에 글말이 끼어들면서 물길은 곧잘 뒤틀린다. 그래도 아주 터무니없진 않다. 소리로나 뜻으로나 어슷한 구석을 찾아 받아적은 덕분에 말밑을 짐작해볼 수는 있다. 마침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삼척 땅에 ‘미로면’이 있다.

‘이로’의 처음을 하나같이 ‘미로’라고 꼽았으니 ‘미로(未老)’란 땅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부터 톺아보자.

우리 조상들은 땅이름에서 ‘물’을 다양한 글자로 적었다. 이를테면 수원은 ‘매홀’, 인천은 ‘매소홀, 미추홀’, 광주는 ‘무진주, 무주’로 적었다. 이때 ‘매, 미, 무’를 학자들은 모두 ‘물’로 해석한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말로는 ‘물(勿), 매(買), 미(彌), 마(馬)’로 썼고, 고려말에서는 ‘몰(沒)’로도 썼다. 그 흔적은 무더위, 무논, 무서리, 무소, 무좀, 무지개, 미나리, 미더덕, 미숫가루 같은 오늘날 말에 그대로 남았다. 앞가지로 쓴 ‘무’와 ‘미’는 모두 ‘물’이란 뜻을 품고 있다. 그런 눈으로 보면 ‘미로’의 ‘미’는 ‘물’이란 뜻으로 쓴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뒤엣말 ‘로(老)’는 [노]로 소리 낸다. 삼국 시대 말 ‘노(奴), 내(內), 뇌(惱), 로(盧), 라(羅)’는 모두 고을, 나라, 땅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삼국사기≫(권 제35잡지 제4)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흑양군(黒壤郡)은 본래 고구려 금물노군(今勿奴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곡양현(糓壤縣)은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괴양군(槐壤郡)은 본래 고구려 잉근내군(仍斤內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금물(검을)=흑(검은)≒거문․큰, 잉벌(너벌)=곡(낟․나)≒넙․널, 노․내=양≒벌․땅’처럼 대응한다. 이로써 고구려말에서 노(奴)나 내(內)는 땅(고을)의 뜻으로 뒤칠 수 있다. 더욱이 노(奴) 자는 흘려쓰면 내(內)처럼 보이기도 한다. 잉벌노는 뒷날 잉화곡(仍火谷)으로 바뀌는데, 잉벌은 ‘너+벌(伐)’로, 잉화는 ‘너+불(火)’의 짜임새다. 곡양도 낟(곡식) 곡(穀) 자 땅 양(壤) 자로 나땅/너땅, 곧 너른 땅으로 적었다고 하겠다.

이제 ‘미’와 ‘노’를 엮으면 ‘미로’는 물의 골, 물이 흔한 곳으로 해석해 볼 만하다.(앞글인 <미로에서 길을 잃다>를 읽어 보길 권한다.) 1917년 ≪조선지형도≫를 보면 ‘이로’는 이 골 저 골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흘러내리면서 올밭들과 홍두들, 개섬벌, 이름말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면서 산골치고는 보기 드물게 널찍한 들이 펼쳐진 곳이다. 1968년에 시멘트공장(쌍용양회)이 들어서면서 삼화 쪽이 지금처럼 커졌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이로 쪽에 집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미로’는 ‘물이 흔한 땅’으로 본다손 쳐도 ‘이로, 니로’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로04.jpg


‘이로’와 ‘여의도’, 너른 땅

이들 말을 살펴보기 전에 서울 한강에 있는 ‘여의도’가 어떤 뜻으로 생겨난 땅이름인지 보자.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 여화도(汝火島), 나의도(羅衣島)’라는 딴 이름도 있다.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땅이름을 한자로 적으면서 사람마다 다르게 적었기 때문이다. ‘잉화도’의 ‘잉’은 [니]로도 읽는데, 옛 땅이름이나 사람 이름에서는 뜻하곤 상관없이 배달말 소리 ‘너/느’를 적은 한자로 본다. ‘여화도’의 ‘여’는 너 여(汝) 자이고 화(火)는 불(벌) 소리를 받아적은 한자다. ‘너(汝)+불(火)+섬(島)’로 해석할 수 있다. ‘나의도(羅衣島)’에서 ‘나’는 ‘너’의 소리 바꿈이요 ‘의’는 옷의 옛말인 ‘벌’을 뜻한다. 곧 ‘나벌’이나 ‘너벌’이란 소리를 받아적은 말이다. 여의도는 ‘너+으(의)+섬’이 되는데, ‘너섬, 너르섬’으로 해석해 봄직하다. 요컨대 한자는 다 다르지만 모두 ‘너벌섬’을 적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노내.png 여의도의 딴 이름들

‘여의도’에서 보듯, 홀소리끼리 넘나듦은 배달말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나고 ‘너러, 느러, 널, 늘’처럼 써도 뜻이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엔 [아]와 [어] 사이 어중간한 소리로 낸 아래아(∙)를 ‘아/어, 오/우, 으’로 받아적은 탓도 있다. 지금까지 말한 바를 바탕 삼아 ‘이로’의 한자 땅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보자.

이로를 쓴 앞글자는 한자 뜻과는 상관없이 공통으로 ‘니’라는 소리를 받아적은 글자로 볼 수 있다. 뒤엣말 ‘로/노’는 ‘벌/불’로 볼 수 있다.

이로의 탄생.png 땅이름 '이로'의 해석

잘 알다시피 ‘니’와 ‘너’는 소리 넘나듦이 잦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자연스럽다. ‘니벌’이 ‘너벌’이요 ‘너벌’이 ‘니벌’이다. ‘너벌’은 너른 벌, 너른 땅을 말한다. 옛 사람들은 넓고 펀펀한 바위를 ‘너러바회’라고 했다. ‘너러’는 ‘넓은, 너른’이란 뜻이다. 너래골, 너래바우, 너래바우골, 너래밭골, 너비령 따위 땅이름에서 ‘너래, 너비’는 넓고 펀펀하다는 뜻을 보탠다.

말이 길었다. 미로와 이로는 조금 다른 뜻이다. 다만 물줄기에 먼저 눈길을 주고 말하면 물이 흔한 땅, 곧 ‘미로’가 되겠지만, 내가 흐르면서 생겨난 펀펀한 땅에 눈길을 주면 너른 땅, 곧 ‘이로’가 된다. 행여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으리라. 존중한다. 다만 나는 먹물들이 두루뭉수리로 써놓은 말밑 뒷줄에 우두커니 서있진 않겠다.


배달말 한입 더

너럭바위 넓고 평평한 큰 돌. =반석. ≪표준국어대사전≫은 '너레바위, 너레돌, 너레반석'을 모두 사투리로 보고 '→ 너럭바위'로 적었다.

너르다 1. 공간이 두루 다 넓다. 2. 마음을 쓰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너그럽고 크다.

너비 평면이나 넓은 물체의 가로로 건너지른 거리. ≒폭.

나비 천이나 종이 따위의 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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