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 없는 학마을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55) 학곡, 학산, 학등, 학마을, 학소대

by 이무완
학등과 학고개와 학곡.jpg 학등, 학고개, 학곡(앞에서부터 차례대로)

'학'이 깃들어 살던 곳

‘학’과 관련한 땅이름이 적지 않다. 학등, 학고개, 학곡, 학고메굼, 학소대, 학바위……. 말하지 않아도 대충 유래가 떠오르는 땅이름들이다. ≪동해시 지명지≫(2017)에 보면, ‘학등’은 문간재에서 청옥산으로 오르는 산 등줄기로, 마치 “학의 등처럼 생겨”서(244쪽), ‘학고개’는 분토골과 쟁골 사이 고개가 “학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277쪽), ‘학곡’은 대구동과 호현동 살피에 있는 소나무 숲인데 이곳에 “학이 많이 날라온 데서”(360쪽), ‘학소대’는 삼화사에서 관음암으로 가는 동골 어귀로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238쪽)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적었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을 보면, 강릉시 구정면 ‘학마을’도 “굴산사가 있어 옛날에는 굴산(崛山)이라 했는데, 그 후 마을 뒷산 우거진 노송에 학들이 서식”해서 ‘학산’이 되었다고 하고, 성덕동에 있는 ‘학동’도 “말산에서 이어져 오는 산줄기가 마치 학의 둥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처럼 ‘학’이 들어간 땅이름엔 내남없이 땅 모양이 학을 닮았다거나 학이 날아와 앉거나 살았다는 유래가 딸려 있다.

cranes07.jpg [앞에서부터] 백로, 왜가리, 두루미(학) (사진 출처: 픽사베이)

학과 두루미, 친척인가?

이쯤에서 ‘학’하고 ‘두루미’가 어떤 새인지 알아보자. ≪훈몽자회≫(1527)에서 ‘鶴 학 학 俗稱仙鶴선학이라고도 한다’이라고 새김을 단 데서 보듯 이미 오래전부터 학은 배달말이다. 학을 가리키는 또 다른 배달말로 ‘두루미’가 있다. 그런데 ‘두루미’와 ‘학’이 같은 새인 줄 모르거나 해오라기나 백로, 왜가리 같은 새를 싸잡아 ‘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학의 다른 말인 두루미는 [두루+미]로 쪼개볼 수 있다. 뒤엣말 ‘-미’는 올빼미의 ‘미’처럼 새를 뜻하는 말로 본다. 문제는 ‘두루’가 어디서 온 말이냐를 두고 해석이 둘로 갈린다.

하나는 울음 소리를 본따서 생겨난 이름이라는 해석이다.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새 도감≫(보리, 2008)을 보면 “‘뚜루루, 뚜루루’ 하고 운다. 울음소리 때문에 두루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짝짓기 때는 부리를 하늘로 추켜올리고 ‘크르크, 크르크’ 하고 운다”(71쪽)고 했다. 두루미는 언제나 암수가 함께 운다. 수놈이 ‘뚜르르 뚜르르’ 하고 먼저 울면 암컷이 ‘뚜룩 뚜룩’ 하고 뒤따라 운다. 우는 소리가 커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일본말로는 ‘쓰루(つる)’라고 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울음 소리를 본따서 지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들(드르ㆍ두루ㆍ뜨르)에 사는 새란 뜻으로 생겨난 이름이라는 해석이다. 두루미를 그린 민화나 병풍 같은 데 보면 소나무에 앉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두루미 습성하고는 맞지 않다. 백로 같은 왜가릿과 새들과는 다르게 두루미는 들판에 산다. 두루미는 땅바닥에 둥지를 틀고 알을 까서 품기 때문에 소나무 가지에 앉는 일은 없다. 더욱이 나뭇가지를 움켜잡는 뒷발가락이 짧아서 소나무에 내려 앉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왜가리나 백로하고는 아주 다르다.

사본 -cranes02.jpg 두루미는 탁 트인 들판에 주로 산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학, 장수와 행운을 상징하는 길조

다시 본줄기로 돌아와 학이 들어간 땅이름들을 톺아보자. 사실 실제 땅 생김새가 학과 닮았거나 학이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은 거의 없다. 대개 뒷날 끌어다 붙인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학○○’이라는 땅이름은 ‘두름’이나 ‘둠’이 소리바꿈하면서 생겨났다. ‘두룸’, ‘둠’은 ‘두르다’를 말밑으로 한다. ‘두르다’는 ‘띠나 수건, 치마 따위를 몸에 휘감다’, ‘둘레에 선을 치거나 벽 따위를 쌓다’, ‘손이나 팔로 감싸다’ 같은 뜻이 있다. 여기엔 ‘둘레를 빙 둘러싼다’는 의미가 공통으로 들었다. ‘두르다’의 옛말이 ‘두루다’다. 말뿌리인 ‘두루’나 이름씨꼴인 ‘두룸’에 ‘뫼(미)’를 붙이면 ‘두루뫼’나 ‘두루미’처럼 되는데, 뒷날 말밑이 흐리터분해지고 두루미의 ‘미’가 ‘뫼’의 소리바꿈인 줄 모르고 ‘산’을 덧대어 ‘두루미산’이 되고, 이를 한자로 뒤치면서 학산(鶴山)이 생겨났다고 봐야 옳다.

앞에서 든 ‘학등’은 문간재에서 청옥산(1403m)에 이르는 산줄기다. 보는 눈길에 따라 학등처럼 얼마든지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학고개’는 분토골과 쟁골을 잇는 고개인데,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두른 듯 이어진 산줄기에 있다. 학의 목을 닮았다는 유래는 어색하다. ‘학곡’이나 ‘학소대’는 탁 트린 들판에서 평생을 사는 학의 생태와는 전혀 맞지 않다. 지금은 멸종위기Ⅰ급이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해야 할 만큼 보기 드문 새이지만 먼 옛날에 흔하디 흔한 새였기 때문 아니겠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지금보다 흔한 새였겠지만 땅이름에 깃든 ‘학’은 학과 직접 관련이 있기보다는 ‘학’을 장수와 행운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새로 보아온 우리 정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학은 천년을 산다고 해서 귀하게 여겼다. 도가에서는 신선이 타고 다니는 신비로운 새로 여겨 ‘선학’이라고 했고, 유가에서는 선비가 본받아야 할 고고함을 보이는 새로 여겼다. 이런 까닭으로 두루미와 관련한 유산도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구려 무용총에는 신선이 두루미를 타고 날고, 청자 상감운학문매병에도 두루미를 새겨 넣었다. 우리가 쓰는 500원짜리 동전에도 두루미를 새겼다.

cranes06.jpg [앞에서부터 차례로] 500원짜리 동전, 무용총의 두루미를 탄 신선 모습,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무늬


배달말 한입 더

두루뭉술하다 1. 모나거나 튀지 않고 둥그스름하다. 2. 말이나 행동 따위가 철저하거나 분명하지 아니하다.

두루춘풍 누구에게나 좋게 대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두름성 일을 주선하거나 변통하는 솜씨. =주변성.

두리광주리 둥그런 광주리.

두리기둥 둘레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 기둥.=둥근기둥.

두리두리하다 둥글고 커서 시원하고 보기 좋다.

두리목 둥근 재목.

두리뭉실하다 1. 특별히 모나거나 튀지 않고 둥그스름하다. 2. 말이나 태도 따위가 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아니하다.

두리반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

두리함지박 둥근 함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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