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고 싶은 나라, 호주

다양성과 여유의 교차점에서

by 윤수호

시드니의 거리 위에서 나는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긴 유럽의 엔틱함과 미국의 세련됨이 어우러진 도시 같아.”


거리 곳곳을 누비는 체코식 트램, 항구를 가로지르는 페리, 빌딩 사이로 보이는 전통 양식의 건축물. 이질적이되 조화로운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도시. 시드니는 마치 “문화적 하이브리드”의 실체를 걷는 듯한 경험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깊이 느낀 것은 ‘다양성(diversity)’이었다.

흔히 다양성은 이상적으로만 이야기되지만, 시드니의 일상에서 그것은 실재했다. 피부색, 언어,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동등하게 거리를 점유하고, 유모차를 끄는 부모들은 당당히 버스에 오른다. 그리고 버스는 차체를 낮춰 유모차의 진입을 배려한다. 이것은 단지 정책이 아니라, 사회가 품고 있는 존중의 태도였다.


호주의 다양성은 단순한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 그 자체다.

이 나라는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졌고, 오늘날에도 인구의 상당수가 해외 출신이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뒤섞여 살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공존을 전제로 한 구조적 현실이다. 그 안에서 갈등이 없을 수는 없지만, 제도와 문화 모두가 그 다양성을 껴안기 위해 끊임없이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한국에서 유모차는 때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맘충’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유통되고, 유모차는 노인들의 짐 운반 도구나 반려동물용으로 더 자주 보인다. 유모차가 단지 바퀴 달린 장비가 아니라, 한 사회가 아이와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의 거울’이라면,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비추고 있는가.

물론 다양성은 창의성과 가능성을 키우지만, 획일성은 효율과 속도라는 장점을 갖는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 속도에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서양은 왜 동양보다 더 여유로워 보일까?

이는 단순한 경제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서양이 동양을 이국적이거나 열등한 타자로 묘사해 온 시선의 역사. 우리는 그 시선을 의식하며 더 빠르게, 더 열심히, 더 효율적으로 살아왔다. 이 조급함과 경쟁의 구조 속에서 여유는 사치가 되었고, 다양성은 혼란으로 간주되었다.


그렇다면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즉 동양이 바라본 서양은 어떠한가. 그 시선은 지역, 종교, 정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호주는 배척이 아닌 공존의 가능성을 품은 서양이었다.

물론 과거의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 같은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를 극복하려는 제도적 노력과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내가 호주에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여행자의 낭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교를 통해 되돌아보게 된 나의 사회, 나의 문화에 대한 질문이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쁜가?
우리는 왜 다른 존재에 불편함을 느낄까?


다시 가고 싶은 나라, 호주.

그 이유는 단순한 경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내가 꿈꾸는 사회의 한 조각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시선의 틀을 넘어, 이제는 서로의 ‘시선’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들여다볼 시간이다.


그 도시는 나를 바꿔놓진 않았지만, 잠시 멈춰 서게 했다.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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