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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Apr 19. 2024

말에 물린 여자

나의 최초 글쓰기

울 아부지가 술을 좋아하는 덕분에 막내딸인 나는 짬짬이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아부지, 막걸리 한 납뙈기 받아 올까유?"


"잉~아니여, 오늘은 니 삼춘들이 온다고 했응께, 맥주 두병만 받아오니라. 병 깨지 말고 살맹이 들고 와야 혀."


귀한 손님이 오실 땐 맥주,

중간 손님이면 주,

한량 손님은 막걸리.


오시는 손님들에 따라 선택적으로 주류를 고르시는 게 아부지의 현명한 법이었다. 우리 집에서 구멍가게로 통하는 샛길엔 종종 치는  발자국으로 없던 길이 가늘게 생겨났다. 시도 때도 없이 귀. 중. 한. 손님들이 방문하다 보니 

발걸음은 바빠졌고, 오솔길은 맨발로 다녀도 좋을만치 잡초하나 없이 반질했다.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가 있다던데, 내가 이렇게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어린것이 어른 말도 잘 듣네. 옛다 받아라, '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내는 심부름값은 그저 껌 값일 뿐이고, 장독대에 쌓여가는  병들바로 내 이유 있는 술 심부름의 진짜 목적이다.


 귀ㆍ중ㆍ한ㆍ손님들이 우리 집에  많이 오실수록  비례하여 빈병들이 늘어났다.  (지금의 국회의원 비례대표제가 혹시, 우리 집을 표본 삼아 제정한 게 아닌가  합리적 의심해본다.)


빈병들을 보며 우리 집 식구들은 남몰래  저마다의 꿈을 다.

어무이는 병 팔아서 하이타이.

아부지는 온리 막걸리.

오빠들은 만화책.

언니들은 예쁜 수첩. 

그리고 나는ㆍㆍㆍㆍ .


장독대에 가득 쌓여있는 빈 병들은 먼저 팔아치우는 게 임자여서 서로 눈치를 보면서 오늘 팔까, 내일 팔까, 기다리고 있을 때

모두에게 통쾌한 한방을 멕여버린것은 바로 아홉 살짜리 나였다. 그것도 빅엿을 말이다.


쩌그럭 쩌그럭~히이잉~캥캥 캥캥

그럭 쩌그럭~히이잉~캥캥 캥캥


 이게 웬 인가!

흑백영화로만 보았던 검정 말을 끌고서 마을에 첫 등장한 엿장수는 흑백 미제 영화에 나오는 보안관, 존웨인을 그대로 닮았다.

(훗날 아무리 엿장수 아저씨를 간지 철절 넘치는 보안관 아저씨, 존웨인으로 각색하려 해도 이것만큼은 내 기억이 완강히 거부한 걸 보면 그냥 한국 짤똥만한 토종 아저씨였나 보다.)


엿구르마를 끌고 온 우람한 말은 뭐라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송아지, 염소, 강아지에 익숙한 내 눈엔 네발 달린 짐승 중에서 '갑오브 더 갑'이었다.


"우리 집에 빈병 많은디유?"


"얼매나?"


"한 백 병?"


"그려? 가 보자"


'쩌그럭 쩌그럭~히이잉~캥캥 캥캥'

조무래기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말구루마와 함께 우리 집으로 향했다. 말 위에는 존웨인이 타고 있었고, 나는 말 옆에 바짝 붙어 보안관처럼 걸어갔다.

 '캥캥 캥캥'

 존웨인의 사박자 가위질 소리는 개선장군환영해해 주는 팡파르처럼 경쾌하게 울려 퍼졌고, 이왕지사 보안관이 된 마당에 동네 바퀴를 순찰하듯 천천히 돌면서 행진해 갔으면 했다. (훗날 나는 이 모습이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영화의 여주인공, '트랄라'가 말을 탄 기마 순경들과 함께 당당하게 행진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우리 가족들의 소망이 가득  담긴 빈병들이

순식간에 말 구르마에 실렸다.

어린아이라고 깜 봐서 그런가, 턱없이 부족한 엿을 받아 들고  말 옆을 지나려는 찰나, 쪽 어깨에 칼에 리는듯한 통증이 뜨겁게 느껴졌다.


"아~~아~악~!! 옴~~ 마~~!!"


어거걱~ 어깨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기절을 했다.


"아이고매~~ 이 냥 반아~~시방 우리 귀한 막내딸을 이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엉! 만의 하나, 우리 딸 못 깨어나면 오늘 말이 죽든지, 당신이 죽든지, 둘 중 하나여!  존말로 헐 때 조캐조캐 하비혀! 큰애야~ 얼른 자전거 타고 가서 박순 오라고 혀라!"


아버지의 노발대발한 음성과 어무이의 훌쩍 거림에 가물게 정신이 들었지만 차마 이 상황에서는


"아부지,  밥 줘유. 배고파."


 말을 꺼낼 수 없다는 것은 아홉 살 눈치로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제일 중요한 '조캐조캐하비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실 말에 물린 어깨가 불에 덴 것처럼 아렸다. 고열까지 있었지만 부모님의 걱정처럼 '만의 하나'는 아니었다. 

가물가물 듣고만 있다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키지 않도록 살망히 콧등으로 이불을 끌어다 가리면서 사알짝 눈꺼풀을 밀어 올려 방안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고 이마엔 물수건을 얹은 채 죽은 듯 누워있었고, 아부지와 어무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기세등등하게 씩씩거리고 있었다. 반면 존웨인 아저씨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존말로 할 때 존웨인 아저씨가 '조캐조캐하비'를 내놓지 못한다면 이런 대치상태로 날을 샐 것만 같았다. 서로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팽팽한 방안 공기가 진짜 만의 하나, 죽거나 살 거나였다.

 숨 막히는 어른들의 세계가 누워있이불속에까지 느껴져서 방귀가 마려운 것을 똥꼬로 포도시 틀어막으며 죽은 척 늘어져있는데 겨드랑이는  간지러운겨.


숨 막히는 정적을 고 드디어  


"여기 얼마 안 되지만 애, 병원비로 쓰십시오. 저도 처자식이 있는데 오죽하면 엿장수를  하겠습니까? 노여움 푸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먼저 총을 내려놓은 것은 때린 사람, 즉, 약자일 수밖에 없는 존웨인 아저씨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안에는 다 죽어가는 만의 하나가 누워있고, 시퍼런 부모님, 군대 갔다 휴가 나온 떡대오빠,  도착 예정 인 지팡이 박순경...'

이 자리에서 쫄지 않고 배 째라 할 배짱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때, 설핏 보이는 방안의 풍경 속에서 짧고 강렬한 교훈을 크게 얻었다. 아홉 살, 아직 한글도 서툰 나이였지만 장차 내 인생의 지표로 삼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지금의 다짐대로 살아야겠다고 맹세를 했다.

 학급 교훈으로 걸어두었던 <차카게 살자>는 쨉이 되지 않았다. 잊어버릴까 봐 속으로 외워두었다가 나중에 노트에 적어놓았다. 아직 한글 받침이 서툴러서 들리는 대로 써두었다.

이것이 아마 나의 최초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ㄷㄷㅐ리며는 마즈ㄹ꺼.  ㅅ말로 하비. 대며는 조오ㅅ땜. 조캐조캐.

(때리면 맞을 것. 좋은 말로 합의. 안되면 망함. 좋게 좋게)


"둘째야, 가서 큰형 데꼬 오너라. 박순경이 물어보면 조캐조캐하비 되었다고 안 와도 된다고 혀라. 당신은 얼릉 일어나 술상 안 차리고 머하는겨?"


며칠 뒤,

" 매애애~~ 매애애~~"

 네발 달린 앙증맞은 염소새끼 한 마리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 후, 학기말시험에서 새옹지마翁地馬 라는 주제에 대해

4.4조 형식으로 시조를 써내시오! 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난 자신 있게  썼다.


귀중한량 민초이 구름같이 모여드니

장독대에 빈병들 태산같이 쌓였더라

지나가던 마부에게 엿으로 바꿨더니

말에물려 죽을 고비 만의하나 넘겼다네


마부눈물  강이되어 조캐조캐 흘러가니

염소새끼 집안으로  매애애애 들어오네

새끼낳아 논을사고 새끼낳아 밭을사니

남부러운 부자되어 효녀심청 따로없네


맥없이 말에 물려서 만의 하나가 될뻔한 막내딸을 부모님은 더더욱 이뻐(효녀) 해 주셨지만 대신, 만화책과 수첩이 날아간 오빠와 언니들에게는 꺼떡 하면 빙상여왕 김연아 가 아닌, 말에 물린 년아~  불리며 집단 다구리를 당했다.

빈병 팔아 염소를 들여온 나를 두고


"저 지지배는 얼마나 생기다 말았으면, 말이 다 물어버리냐, 어이가 없네?"


"그러게 저 가시나는 뒷발로 맞아써야했는디..."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 효녀 심청은 아무나 하냐? 나나됭게 하지.'로 응수했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살면서 말()을 물어낸 적은 없다.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거나 삼자대면을 한 적도 없다. 미리 단단히 맞아 놓은  말, 예방주사 덕분이다.


 토론을 진행하면서 말 싸움으로 번져 상황이 험악해졌을 때, 밑도 끝도 없이


"야!! 야!! 다들 시끄럿!!! 나, 말에 물린 년야!!!"


"??!! 허거걱!!!"


 복식호흡으로  말 한마디를 던지면 곧바로 상황이 종료된다.

벌어진 어깨와 등빨, 탄탄한 말근육허벅지, 펑퍼짐한 말궁뎅을 빼닮은 나를 바라보면 

'필시 저 여자는 말과 싸워서 승리를 쟁취한 무지막지한 여자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전도유망한 사람들이 말()로서 나락 간 경우를 많이 보았다. 자나 깨나 말() 조심이다.

어릴 때부터 말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탓인지 요즘 브런치에서 이 말() 저 말을 끌고 다니며 말장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 많이들 팔아주길 바란다.

오늘 말이야기를 하다 보니 말이 길어진 것 같다.

이만 을 끝내야겠다.

히이잉~~~.


(배경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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