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조음 Apr 26. 2024

엿 사시요! 엿 사

내 유년의 뜨락은 언제나 저수지였다.

 엄마는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나는 고운 모래로 이를 닦으며 맹글한 돌멩이로는 손등의 때를 벗겼다. 빨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지면 새우를 잡아볼 요량으로 고무신을 벗어 쥐고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고기도 아닌 것이 여기서 폴짝, 저기서 폴짝, 잡힐 듯 말 듯 그 느릿한 투명함에 반하여 맹물만 담아내다 지쳐서 걸어 나오면 고무신 뒤꿈치에서 맹꽁이 울음소리가 났다.   

  


 변변한 먹을거리 가 없는 시골에서 오재미 치기를 하며 놀다가 멀리서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질소리가 들려오면

갑자기 폭탄이라도 떨어진 양,  하던 놀이를 일시에 멈추고서 다들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몸은 대문 앞에 서 있는데 두 눈동자는 십리는 쭉 빠져나와 떨어진 신발이나 양은그릇, 고철덩어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마당가에서는 마땅한 물건이 들어오지 앉자, 부엌으로 들어서니 마침 아궁이 앞에 오래된 풀무가 있길래 그걸 들고서 냅다 뛰어가는 내입에서는 단침이 가득 고였다.


누렁이 놈도 내 뒤를 껑충껑충 뛰면서 따라왔는데 주인어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큰 사단이 벌어질 것을 염려하여 철딱서니 없는 나를 말리려 했던 모양이었다. 허나, 엿 눈 엔 엿만 보이더라고, 엿에 눈이 멀어 버린 내 눈엔 누렁이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정순이는 달게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할머니의 흰머리를 뽑아 주는 척하며 살그머니 은비녀를 빼내어 가져 오고, 용이는 하필이면 그날 밥을 태워 우물가에 내다 놓은 솥단지를 끌고 나왔다.

상꼬맹이 신주는 생긴 것만큼이나 얌전하게 눈부신 놋요강을 뚜껑까지 덮어서 가져왔다. 눈이 째진 엿장수아저씨는 신주가 가지고 온  놋요강을 바라보며 유난히 눈을 빛냈고, 인심도 후하게 다른 아이 들보다 곱절은 더 호박엿을 떼어 주었다.  막대엿 도 연필 한 다스 정도나 내주었다.


 가위질 소리만 들어도, 멀리서 리어카를 보기만 해도 저절로 단침이 고이는 호박엿에 팔려 엿장수의 아들이고 딸이기를 얼마나 소원했던가.

이빨이 몽땅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영혼을 내어줄 만큼이나 맛있는 달달물컹쫀득호박엿.


“여태까지 키워주셔서 고맙구만유~, 지는 엿장수 아저씨 따라가 살거구만유~. ”


울고 짜며 인사할 필요도 없이 지금 당장 리어카에 실려가도 좋을, 납작뭉글앙큼호박엿.


마을에 들어설 때의 느긋한 가위질 소리와는 달리 논밭에서 일하느라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서 한몫 단단히 챙긴 엿장수는 허둥대며 꽁지가 빠지게 마을을 빠져나갔다.

이제 엿장수가 가다가 거꾸러져서 엿판이 깨구락지판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아저씨의 개인 사정 일 뿐일 테고, 우리는  호박엿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모다 들 해탈한 동자승이 되었다. 이때, 그 누구든 말이라도 걸라치면 피보다 진한 엿물이 주르르 흐르는 탓에 침묵으로써 여기서 오물, 저기서 오물.

 ‘ 바람은 바람이고, 엿 맛은 엿 맛 이로고.


깊은 득도의 경지를 한참 즐기고 있는데

입안에서 채 가시기 도 전에, 


“이 노무 새끼! 그게 어떤 요강인데... 증조할머니  시집올 때 가져온 보물을 엿 바꿔 쳐 먹어? 귀하게 가보로 내려오는 것이라서 오줌을 싸지도 않고 모셔 놨더니, 그걸 집어다 팔아 쳐 먹어? 엉! 이 씨앙놈의 새끼, 오늘 매맛 은 어떤가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


  여기저기서 철퍼덕 철퍼덕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 고샅길까지 울리는 바람에 밤낮없이 앙앙거리는 고양이들조차 뒷다리를 들고 살살 거려야만 했다.


 할머니의 은비녀를 팔아먹은 정순이는 우왁스런 엄마의 손에 머리끄뎅이 를 잡혀 머리가 한 웅큼 빠져버렸고, 솥단지를 팔아먹은 용이는 그만큼 맞고도 죽지 않은 게 하늘이 도운 일이고, 풀무를 팔아먹은 나는


“ 야, 이오살년아, 이 씹어 먹을 년아. 아나~어매까지 팔아먹어 봐라! 호랭이가 물어갈 년, 집구석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씨, 때릴 거 면 욕을 말던가, 욕을 할 거 면 때리지를 말던가. 매는 매대로 맞고 욕은 욕대로 푸짐히 얻어먹고 쫓겨났다. 그중에서 놋요강을 팔아먹은 신주는 어찌나 매를 심하게 맞았던지 눈탱, 밤탱, 코탱, 입탱...

 헉! 그 푸르뎅뎅한 모습에 ‘저게 인간이여? 외계인이여?’ 우리들 꼴도 가관인데 우리보다 더 험한 꼴을 하고 있는 신주의 손을 잡고서 후미진 담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닭똥 같은 눈물만 흘렸다.

그 누구라도 지나가다가 우리들의 몰골을 보았더라면 동전 한 닢 던져주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쫓겨난 우리들은 난생처음 동지(?)가 무엇인지, 메주 냄새나는 방안이 얼마나 따뜻한 곳인지, 맨날 지겹게 먹었던 꽁보리밥과 된장국이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었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리고  그날, 이날의 치욕과 상처를 절대로 잊지 말며 평생 변치 않은 동지로 살아가자고 뒤담결의(뒤지게 맞고 쫓겨난 담장 아래에서 뜻을 세운결의)를 하였다.


 그 후론 무엇이든 주면 먹고, 안 주면 안 먹는, 아주 착한 아이가 되고 말았으니 어릴 적 맞은 매, 여든까지 간다? 고 그렇게 몽씬 매를 한 번쯤은 맞아야만 정신이 들긴 드는 모양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종아리가 욱씬욱씬 쑤셔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때 풀무를 엿 바꿔 먹고 부지깽이로 얻어맞은 후유증은 아닐는지. 신주도 술을 많이 먹은 날이면 얼굴이 푸르뎅뎅해지던데 그것 역시나 그때의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전화에서 정순이는 원형탈모가 시작되었다고 투덜거리던데, 혹시 그것도?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들을 함박웃음 짓게 하던 것들이 어디 엿장수뿐이었을까? 뻥튀기아저씨가 끌고 오던 검정말은 얼마나 신기했던가, 여름날 학교 운동장에서 보여주는 반공영화와 겨울철에 논바닥에 천막을 치고 보여주던 유랑극단의 장화홍련전은 또 어떻고.


 너나 할 것 없이 누런 콧물을 가래떡처럼 흘리고 다니며 땟물이 주르르 흐르는 짭조름한 얼굴들이었지만 저수지에서 풍덩풍덩 배를 까뒤집으며 튀어 오르던 고기들만큼이나 싱싱하게 빛나던 눈동자들.

 누구나 가난을 절절히 실감하던 시절이었지만 훈훈한 정을 나누던 삶 속에서 보낸, 내 생애 최고의 아름다운 순간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울고 웃으며 지내던 삶 속에서 보낸, 내 생애 최고의 행복했던 시간들.

 욕살, 맷살, 거기다 뻔뻔 살까지 붙어버려 어린 날 보다 더한 욕을 해댄다 할지라도 나는 이제 끄떡도 하지 않을 건데, 촘촘한 가시 달린 몽둥이로 내 종아리를 후려친다 해도 나는 이제 울지도 않을 건데.


 부모님은 내가 그렇게 배꼽을 내놓으며 뛰어다니던 저수지 옆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누워계신다. 어떤 아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벌써 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누워있기도 다.

 언제나 저 자리에서 잔잔히 흐르는 푸른 강물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저 미루나무는 나중에 우리가 어른 되어 만나게 되는 세상을 이렇게만 해맑은 얼굴로, 이렇게만 깔깔 종알거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으리라.

이전 14화 말에 물린 여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