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삼겹을 굽지도 않았는데 입에 침이 고여서 손이 빨라집니다. 여름인지라 밥보다는 비빔면이 나을듯해서 한 개 반을 끓입니다. 전기 그릴 주변엔 신문지를 깔아 둡니다. 살림의 끝판왕이죠. 완벽한 세팅 후에 잠깐 정지! 얼른 씻으러 갑니다. 고기쌈에 시원한 맥주 한잔 할 생각에 거품도 대충 닦고서 파자마 바람으로 앉았습니다.
전기그릴을 on으로 누르고 둘둘 말아진 삼 겹 세장을 촤르르 펼칩니다.
치치치치~치치치직지지~환상의 소리입니다. 양철 지붕에 소낙비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몽돌 해변가 파도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기름에 구워지면서 노릇하게 익어갑니다. 한번 뒤집고, 두 번 뒤집고 옆에다 기다란 묵은지 한가닥을 올려놓습니다.
타타닥~치치치~지치치직~ 삼겹에 묵은지를 더하니 북소리에 꽹과리를 얹은 듯 경쾌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통마늘과 양파, 송이버섯까지 올려놓으니 그릴이 가득 찹니다. 마늘이 익어가면서 통통 튀어 오릅니다. 심벌즈 때리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오케스트라가 따로 없습니다. 삼겹과 묵은지를 가위로 뚝뚝 잘라 놓고 불을 줄입니다. 환상의 궁합에 눈이 돌아갑니다. 전쟁이 나더라도 삼겹은 다 먹고 피난짐을 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경건하게 왼손에 상추 한 장을 먼저 깔고 깻잎, 땡고추, 마늘, 묵은지를 올린 후 삼겹 한 점을 기름장에 살짝 찍은 후 잘 오므립니다. 와~~ 아직 입에 넣지도 않았는데 벌싸 먹은 것 같은 이 기분. 입보다 더 큰 상추쌈을 막 넣으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립니다. 무시합니다. 계속 벨이 울립니다. 다시 상추쌈을 입에 넣으려다 내려놓습니다. 얼른 통화를 끝내고 먹는 게 편할 것 같습니다. 이 통화가 끝나고 나면 전화는 잠시 꺼두기로 마음먹습니다.
왕궁뎅언니
"불금인데 총무님은 뭐 하셔? 집에 혼자 있는감?"
- 예. 지금 막 저녁 먹으려던 참이었어요.
"아이고~어쩔끄나. 이런 날 총무는 혼자서 밥을 먹고 있네. 난 밥 먹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집밥 먹은 지가 넘 오래됐네. 총무는 불금인데 약속도 없구나. 우리 집엔 작년에 10킬로 사다 놓은 쌀이 풀지도 않고 그대로 있다네. 또 가래떡으로나 빼얄랑가벼."
ㅡ저도 지금 삼겹 궈 먹으려고 해서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아니~삼겹을 먹는다고? 무슨 삼겹을 먹어? 총무님? 그런 거 먹지 마! 동맥경화 지대로 온다는 말 못 들었어? 우리 옆짐 할머니가 그렇게 고기만 구워 먹더니 뇌출혈 생겨서 실려갔잖아. 내 친구는 벌써 스텐을 팔에다 세 개나 박았다니까. 삼겹 기름이 혈관 막히는데 주범이래야 주범. 일찍 죽는 건 괜찮은데 뇌출혈로 사지 마비되면 어떻게 살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니께. "
ㅡ ... 저 저녁 먹어야 하니까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
"호호~내 말 기분 상하게 듣지는 말어. 내가 다 총무님을 아끼고 사랑해서 허는 말이야.. 호호~전에는 지하철에서 잘생긴 훈남이 나한테 말을 걸더라니까. 시간 있으면 커피나 한잔 하자고~호호."
ㅡ아, 예~ 젊게 살면 좋지요. 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이런 말 해도 될랑가 모르겠는데, 할까 말까 망설이다 하는 거니께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어."
ㅡ예? 제가 뭔 실수라도 했나요?
"총무가 한 달 전에 유정란 팔았잖혀? 회원들이 총무 얼굴 봐서 다 사준 거 같은디 그걸로 말이 많더라고..."
ㅡ 예?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유정란 팔면서 손해가 얼마나 많이 났는데,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그리고 왕언니는 계란 안 샀잖아요?
"아니 참~목소리를 왜 높이고 그랴~ 회원들이 총무보고 직접 말하겠어. 내가 눈치로 알아차린 거지. 그걸 대놓고 말할 사람은 없지. 안 그랴?"
ㅡ무슨 이야기인데 그래요? 말 돌리지 말고 직접 해주세요. 그래야 알아듣죠?
"그려~ 우리 총무는 참 화끈해서 좋아. 그 왕란 궁뎅이에 있는 숫자 봤는가?"
ㅡ?? 무슨 계란에도 궁뎅이가 있어요? 양계장에서 바로 가져온 거라서 숫자가 없었는데요?
"거봐 거봐~ 참 나~이럴 줄 알았어. 사람들이 참 단순무식하다니까. 아니 우리가 마트에서 계란을 사면 날짜랑 숫자가 계란 궁뎅이에 찍혀있잖아.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은 참 몰러. 답답 혀~ 답답."
ㅡ그니까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으니 설명을 해보시라고요.
" 왕란 네 판을 준다니께 회원들이 벌떼처럼 달려드는디 내가 계란 궁뎅이를 살짝 보니께 숫자가 없어서 이건 필시 불량품이라고 난 한눈에 알아봤지러. 내가 아주 꼼꼼한 사람이거덩. 내가 거기서 막 따지면 총무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 지금 말하는 거시여. 닭알이라고 다 닭알이 아니고, 유정란이라고 다 유정란이 아닌 거시여. 총무님, 듣고 있남?"
ㅡ ?? 예. 말씀하세요.
" 마트에서 파는 계란은 말이여, A4용지만 한 데서 사료만 쪼아 먹는 닭에서 나오는 알이여. 그 알이 무슨 영양가가 있겠어? 내 말이 틀려? 나는 풀밭에서 놓아 먹이는 1등급 계란 아니면 안 먹는 사람이여. 난 숫자 1을 네 판에 만원에 파는 줄 알고 사러 간 거지. 그런 계란은 공짜로 줘도 안 먹는당게."
"아니~총무님, 왜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그랴, 진정혀. 난 그런 계란 공짜로 줘도 안 먹는다니까 그러네. 한 개를 먹더라도 건강하게 몸에 좋은 걸 먹어야지, 두부도 슈퍼에서 아무거나 사다 먹지 말어. 그것 다 중국산 콩으로 만든 거시여. 그게 무슨 영양가가 있겄어. 안 그랴?"
ㅡ그니까!! 계란 가져가신 분들이 왕언니한테!! 뭐라 했냐구욧!!
"아니~뭐라 한 사람은 없는데 내가 봤을 때는 계란등급을 보고 팔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지. 총무가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거시여."
ㅡ왕언니!! 그렇게 1등급 왕란을 세 판에 만원, 아니 네 판 만원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욧!!!
다 싼 것은 싸고 비싼 것은 비싸기 마련인데 1등급 계란을 누가 미쳤다고 한판값도 안되게 파냐구욧!!!
"아이, 참~ 나는 총무가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그렇게 화를 내면 어떡햐? 화내면 빨리 늙어~ 화내지 마. 버럭 하는 거 보니께 울 총무도 갱년기 인가만. 그래서 그런가 요즘 총무 얼굴이랑 몸이 옛날과 많이 다르더라니. 눈밑에 주름도 자글자글하고, 피부도 까칠해졌어. 당뇨는 없는겨? 몸이 부은 거 보니께 당뇨끼가 있는 거 같은디? 살이 그새 팍 쪘남? 당뇨 검진 한번 받아봐 봐. 난 아직도 처녀 적에 입었던 55 사이즈를 지금도 입잖혀. 대학생 손주 티하고 청바지를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손주랑 친군 줄 열더라니께~ 호호"
ㅡ 후~~~~ 더 하실 말씀 없으세요?
"호호. 사실 우리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여. 남편이 웬일로 여기 유명한 일식집에 겨우 예약해 놓았다니까. 어디 들렀다 온다면서 기다리라고 허는디 혼자 있기 뻘쭘해서 시간 때울 겸 총무한테 전화 좀 한거여. 오매~ 사람들 꽉 찼네. 내 선물로 금은방에다 보석 맞춰놓은 거 찾아온다고 늦는다고 하대. 작년에는 골드바 두 개를 선물로 받았어. 총무는 골드바 들어봤을까? 무거워서 손목 나가는 줄 알았다니께.
저기~ 우리 서방님 온다. 아이고야~ 붉은 장미 꽃다발도 한아름 들고 오네. 호호~ 사람들이 와~하는 소리 들리는감? 괜스레 우리 총무 삼겹 먹는데 귀찮게 전화했네그려. 많이 잡숴. 여~~~봉, 왜이제 와잉~~ 한참기다렸잖아. 앙~~ 앙 미워~엉~~ 뚝!!"
ㅡ여보세요??.......
그렇게 맛있어 보이던 삼겹과 묵은지가 시커멓게 변해버렸습니다. 하얗게 기름이 굳은 채로 식어버렸습니다.
노빠구 회장의 거실에다 내던져 버리고 싶었던 계란이야기가 다시 나오니 그때의 분노가 치밀어 올라옵니다. 입맛이 싹 가셔 버렸네요. 푸릇푸릇 쌈채도 시들해져서 말라버리고비빔면은 덩어리가 되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또 불금을 잡쳐 버리고 말았네요.
총무는 김 빠진 맥주를 들이켭니다. 심심맹숭, 미적지근해서 도저히 삼킬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싱크대에 부어 버립니다. 불판 위의 마늘과 송이버섯은 염소똥처럼 시커멓게 타버렸네요. 다 타버린 삼겹과 묵은지, 야채와 장아찌, 기름장까지 다 치워버립니다. 불금에 쫄딱 굶어버렸네요.
총무는 보기에도 너무나 매운 청양고추를 그대로 입에 넣고 씹어 버립니다. 그리고 용가리의 입김을 화아락~~~~ 품어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