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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Jan 30. 2024

비밀의 정원

저수지 아이

그 누구에게나 혼자만이 간직하고픈 비밀의 정원이 있을 것이다.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저수지가  가장 큰 바다인 줄 알았던 나는 마을 끝 감나무 언덕이 마냥 좋았다. 그곳에 앉아 파아란 물결이 일렁이는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숙제도 잊고 배고픔도 잊고 그야말로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맘껏 누릴 수 있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의 강가는 무한한 신비의 동화 나라였다. 햇빛에 반사되는 금빛 물결이 너무나 아름다워 저수지가 노을빛을 베개 삼아 스르르 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일어섰다. 한 여름 고기떼들이 풍덩풍덩 튀어 오르고, 서리 내린 스산한 들녘에 대봉시들은 마을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한겨울 하늘을 덮고도 남을 청둥오리 떼가  창공을 향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모습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른이 된 지금도 독감이 걸려 숨쉬기조차 힘들거나  손가락을 다쳐 피를 흘리며 응급실에 실려 가는 구급차 안에서도 이 풍경들을 떠올리면 거짓말처럼 금세 평안을 얻었다.


이렇게 감나무 언덕에서 저수지를 바라보며 자라난 나는 자연스레 작가를 꿈꾸게 되었고 저수지의 잔잔한 물결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겠노라고.. 그냥 손끝으로 써 내려가는 글이 아니라  속울음 삼키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가슴으로 써 내려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글을 쓰겠노라고. 그래서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작가가 되어 이 자리에 서 있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오직 아름다운 글로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겠노라던  다짐은 남의 눈물을 닦아 주기는커녕 제 눈물만 바가지로 흘리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
비록 나의 삶은 눈물의 강으로 흘려보냈지만, 짜디짠 눈물로 인생의 강을 건너야 했지만  이 자리에 묻힐 때까지 저기 저 푸른 강물은 언제나 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저 언덕의 감나무는 언제나 주렁주렁 별을 매달고 있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돌멩이를 던진다 하더라도 이 언덕으로 도망쳐 들어오면 평안한 고요가 나를 깊게 잠들게 하기를..

 내 안식의 땅. 그곳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  누가 알 세라 감나무 언덕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가끔씩은 그곳을 잊어버리고 세월을 보낸 적도 있었지만 일 년에 서너 번씩 고향을 방문할 때면 예전처럼 감나무 언덕을 오르곤 했다.

 그렇게 영원히 내 비밀의 화원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건만 화원의 빗장이 맥없이 풀리고 말았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 나의 심연 속에 꼭꼭 숨겨놓은 화원의 주소를 귀신같이 알아내어 카페를  차려 놓은 것이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꼭 이 자리에 멋진 오두막을 짓고, 눈물을 훔치던 날들을 풀어내어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었다. 유리창 마다마다 저수지의 사계를 담으며 감나무와 함께 늙어 가고 싶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은 바로 여기 이 자리인데. 그 누군가가 콕! 저수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세련되고 웅장한 카페를 열고 말았다. 이곳에 대형 카페를 짓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문에 오죽하면  한달음에 달려와 공사 중 인 주인을 만나 봤을까.

 오랜 세월 동안 묵혀두었던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갑자기 왜, 얼마에 팔았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볼품없는 한적한 감나무 언덕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이 누구인지 제일 궁금했다. 누군지 몰라도 놀라운 사람이다,  인정하고 말았다.  


내 꿈을 강탈당한 느낌이었다. 내 금싸라기 땅을 빼앗긴  것만 같았다.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먼저 잡는 게 임자이고 복인 것을. 처음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으나 만약 나에게 땅값을 치를만한 돈이 있었다면 과연 매입을 했을까? 단연코 아니다. 돈이 아까워 시인의 오두막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이깟 감나무가 무어라고  큰돈을 투자하나 싶어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전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엄두조차 내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부러워서,

괜히 샘이 나서,

괜히 초라해져서.. 이렇게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개업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부러울 정도로 시설이 훌륭했다. 커피도 신선하고 갓 구워낸 빵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주말이면  긴 줄을 서야만 입장할 수 있었다. 이제 동네 사람 몇몇을 제외하고는 예전 감나무 언덕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넘실거리는 저수지를 아주 편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다. 어린 내가 그러했듯이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어디쯤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오신다면 잠깐이나마 여기가 바로 작가의 비밀 정원이었구나, 하고 기억해 주시길.

공사 전 모습

완공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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