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에게나 혼자만이 간직하고픈 비밀의 정원이 있을 것이다.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저수지가 가장 큰 바다인 줄 알았던 나는 마을 끝 감나무 언덕이 마냥 좋았다. 그곳에 앉아 파아란 물결이 일렁이는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숙제도 잊고 배고픔도 잊고 그야말로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맘껏 누릴 수 있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의 강가는 무한한 신비의 동화 나라였다. 햇빛에 반사되는 금빛 물결이 너무나 아름다워 저수지가 노을빛을 베개 삼아 스르르 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일어섰다. 한 여름 고기떼들이 풍덩풍덩 튀어 오르고, 서리 내린 스산한 들녘에 대봉시들은 마을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한겨울 하늘을 덮고도 남을 청둥오리 떼가 창공을 향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모습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른이 된 지금도 독감이 걸려 숨쉬기조차 힘들거나 손가락을 다쳐 피를 흘리며 응급실에 실려 가는 구급차 안에서도 이 풍경들을 떠올리면 거짓말처럼 금세 평안을 얻었다.
이렇게 감나무 언덕에서 저수지를 바라보며 자라난 나는 자연스레 작가를 꿈꾸게 되었고 저수지의 잔잔한 물결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겠노라고.. 그냥 손끝으로 써 내려가는 글이 아니라 속울음 삼키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가슴으로 써 내려가 그들의눈물을 닦아주는 글을 쓰겠노라고. 그래서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작가가 되어 이 자리에 서 있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오직 아름다운 글로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겠노라던 다짐은 남의 눈물을 닦아 주기는커녕 제 눈물만 바가지로 흘리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 비록 나의 삶은 눈물의 강으로 흘려보냈지만, 짜디짠 눈물로 인생의 강을 건너야 했지만 이 자리에 묻힐 때까지저기 저 푸른 강물은 언제나 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저 언덕의 감나무는 언제나 주렁주렁 별을 매달고 있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돌멩이를 던진다 하더라도 이 언덕으로 도망쳐 들어오면 평안한 고요가 나를 깊게 잠들게 하기를..
내 안식의 땅. 그곳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 누가 알 세라 감나무 언덕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가끔씩은 그곳을 잊어버리고 세월을 보낸 적도 있었지만 일 년에 서너 번씩 고향을 방문할 때면 예전처럼 감나무 언덕을 오르곤 했다.
그렇게 영원히 내 비밀의 화원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건만 화원의 빗장이 맥없이 풀리고 말았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 나의 심연 속에 꼭꼭 숨겨놓은 화원의 주소를 귀신같이 알아내어카페를 차려 놓은 것이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꼭 이 자리에 멋진 오두막을 짓고, 눈물을 훔치던 날들을 풀어내어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었다. 유리창 마다마다 저수지의 사계를 담으며 감나무와 함께 늙어가고 싶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은 바로 여기 이 자리인데. 그 누군가가 콕! 저수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세련되고 웅장한 카페를 열고 말았다. 이곳에 대형 카페를 짓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문에 오죽하면 한달음에 달려와 공사 중 인 주인을 만나 봤을까.
오랜 세월 동안 묵혀두었던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갑자기 왜, 얼마에 팔았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볼품없는 한적한 감나무 언덕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이 누구인지 제일 궁금했다. 누군지 몰라도 놀라운 사람이다, 인정하고 말았다.
내 꿈을 강탈당한 느낌이었다. 내 금싸라기 땅을 빼앗긴 것만 같았다.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먼저 잡는 게 임자이고 복인 것을. 처음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으나 만약 나에게 땅값을 치를만한 돈이 있었다면과연 매입을 했을까? 단연코 아니다. 돈이 아까워 시인의 오두막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이깟 감나무가 무어라고 큰돈을 투자하나 싶어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전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엄두조차 내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부러워서,
괜히 샘이 나서,
괜히 초라해져서.. 이렇게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개업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부러울 정도로 시설이 훌륭했다. 커피도 신선하고 갓 구워낸 빵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주말이면 긴 줄을 서야만 입장할 수 있었다. 이제 동네 사람 몇몇을 제외하고는 예전 감나무 언덕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넘실거리는 저수지를 아주 편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다. 어린 내가 그러했듯이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어디쯤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오신다면 잠깐이나마 여기가 바로 작가의 비밀 정원이었구나, 하고 기억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