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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Feb 13. 2024

은행 한 알이 내 입에 들어오다

은행을 주우며

간밤에 비가 내리더니  절 마당에 은행이 가득하다. 한 알 한 알 주울 때마다 허리를 굽힌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고작 은행 한 알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힌다. 냄새까지 아주 고약하다.  뻣뻣한 자세로는 땅에 떨어진 은행을 주울 수 없다. 모든 삶이  그러하다. 허리를 굽힐 줄 아는 공손함이 세상살이에 수월하다.  그래서 절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게下心이다. 

 줍는 대로 마대자루에 담아  모아둔다. 너무 많이 담으면 들지를 못한다. 한 무더기씩 담아 두어야  씻을 때 편하다. 장화를 신고 자근자근 밟는다. 물컹한 껍질이 벗겨진다. 아무리  두발에 힘을 실어 질을 벗겨내도 단단한 알맹이는 결코 깨지지 않는 법이.  


 씻어 말리고 한 알  한 알  톡톡 깨뜨리는  일련의  과정은 비단 은행뿐 아니라 한 톨의 밥알,  상추 한 잎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다가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팔십 년 묵은 은행 한알이 내 입에 들어오는 과정이 이리 고단한데 하물며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해서 말해 무엇하랴.  알의 은행도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사람인들 말해 무엇하랴.


초 여름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가을 중순이 되면 노랗게 익어간다.

가을엔 은행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만하다. 떨어지는 데로 은행을 주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발에 껌처럼 눌어붙어서  여간 고역이 아니다. 구린내가 진동해서 코를 싸쥐며  돌에 비벼서 겨우 떼어내야 한다.

여느 농부님들이 그러하듯이 가을은 만물을 거둬들이는 시기이다.

 벼, 구마, , 밤, 깨, 대추.. 거두는 시기를 놓쳐버리면 곧바로 서리라는 강적을 만나기 때문이다.  미리 갈무리를 해두어야 비로소 일  농사가 끝나는 것이다.  몇 가마니를 주워도  껍질, 속 껍질을 버리고 나면 실상 손에 쥐는 알맹이는 매우 적은 편이다. 아무리 기계화가 되었다고는 하나 대량 판매하는 농장이 아니고서는 일일이 줍고 씻고 말리고 까서 냉동 보관 하기까지 그 수고로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지경이다.


 또각또각 은행 까는 도구를 사용하여 일일이 사람 손으로 까네야 만 하는데, 그 단순 작업이 또  인고의 시간이다. 수행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은행은 귀한 음식으로 보약재가 되는 것이다.  바가지 정도는 누구나 재미 삼아 할 수 있지만 수십 킬로 단위로 계산되면 한숨부터 쉬어지는데 사람 손이 참 무섭긴 무섭다. 겨울 내내  그 많던 은행을 모두 손질하고 나면  손이 허전해서 심심해진다.

자연의 이치는 참 묘하다. 다갈다갈 달려있는 열매를 두 떨어 뜨린 후에야 비로소 은행 잎이 노랗게 물들어 간다.  일을 다해 마친 것처럼 우수수 잎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빈 몸으로 겨울을 맞이한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 처음인 것처럼 싹을 띄우려 가지를 한껏 벌려 기지개를 켠다.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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