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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Feb 06. 2024

텃밭 예찬

엄니의 텃밭

"막내야~아이고, 반찬도 없는디 큰일 나부렀다. 장성서 느그 큰 외삼춘이랑 외숙모 오셨당게. 얼릉 바가지 들고 텃밭에 나가서 고추랑 가지랑 돔보콩도 대여섯 개 따오고 대파랑 양파도 여남은 개씩 뽑아 오니라. 양파 뽑을 때 밑둥아리다가 힘줘서 뽑아야 헌다. 흙도 탈탈 털고. 밭고랑 지딱지딱 밟지 말고 발자국 안 패이게 살망살망 돌아 댕겨라."

    

 기별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 때문에 허둥대시는 엄니를 뒤로하고 ‘뭘 다 뽑아오라는 것인지, 다 외울 수는 없지만 텃밭에 가서 대충 바가지 가득 담아 오면 되겠지’ 느리게 대문 밖으로 나갈 때면 알전구 희미한 부뚜막이 새 손님 밥을 안치는 장작불로 환해진다. 닭장에선 '꼬끼오~ 꼬꼬꼬꼬~' 놀란 닭들의 홰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고, 부엌에선 '다다다닥~딱딱딱딱~~' 엄니의 도마질소리가 속력을 더한다.  

 ' 피시시~ 피시시픽~ 삐~삐~시쉬쉭'. 

솥뚜껑이 들썩거리고, 참기름 조물조물 무쳐낸 반찬이 소반에 하나 둘 차려지면 닭 삶는 냄새에 누렁이가 신이 나서 덩달아 컹컹 짖어댄다.     

  “야야~저기 마롱 끄트머리, 모서리 기둥에 석쇠 걸려 있지야? 얼릉 내려와서 김 좀 꾸버바라. 불티 조심해서 뒤집어야 헌다.“

동부콩 콩콩 박힌 윤기 자르르한  쌀밥에 금방 무쳐낸 생채와 가지볶음, 되직한 강된장 뚝배기에 오이와 솔을 듬뿍 넣은 겉절이, 애기호박 새우무침과 땡고추 송송 썰어 무친 갈치속젓, 들기름 듬뿍 발라 석쇠에 구워낸 돌김, 잘 익은 백숙과 더덕 담근 주로 한 상이 차려진다.  

   

 "어이구야~~ 어찌게 밥상을 금세  채려 냈다냐? 뭘 이렇게 많이 차려냈남. 큰집 어르신네 병문안 왔다가 누부 얼굴 본 지도 오래되야서 왔더니만 괜시리 폐만 끼치네그려. 밥상을 받응게 시장기가 동하는구만. 자네도 같이 한잔, 어서 들세.“     

 엄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친정 오라버니 내외의 입맛에 맞지나 않은지 살피느라 부엌과 안방을 오가며 분주하다.

통통한 닭다리를 쭉 찢어 외삼춘 그릇에 얹어주고 외숙모 앞으로 반찬 그릇을 당겨주면서 옆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 나에게도 가슴살 한 점을 먹여주신다.

     

  사시사철 먹거리를 쉴 새 없이 길러내어 여섯 남매의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던 엄니의 텃밭. 가끔 술에 취했다 하면 밥상을 엎어버리시던 울 아버지도 텃밭 주변엔 얼씬도 못하였고 뮐 심어놓든지 간에 끓여 주는 대로 잡수셔야만 했다. 이렇듯 텃밭은 엄니의 신성불가침 성지 l聖地이면서 식품 저장고였다. 울 엄니가 요즘 방송국에서 열리는 뚝딱 상차림 경연에 나가신다면  단연코 최고 승자가 되었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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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때부터인가 시골길을 지나다 잘 가꾸어진 텃밭이 보이면 가만히 내려다보는 습관이 생겨났다. 밭둑에 앉아 ‘이 집 쥔네는 식구도 많은가 보네. 김장거리 별거별거 솔찮게 심어놨네. 참 부지런한 양반인가 보구만.’ ‘이 집 텃밭은 쥔네가 어디 아프신가. 풀이 웃자라서 잡초 밭이 다 되아부렀네. 아이구, 상추랑 쑥갓도 다 쇠아 버려서 먹지도 못하겠네. 심어놓고 한 번도 못 와본 모양이고만.’


얼굴도 모르는 텃밭 주인의 안부를 걱정하곤 한다. 남의 텃밭 둑에 물끄러미 앉아서 주저리주저리 혼자 말을 하고 있으면,  

    “울 망내가 오랜만에 친정에 왔는디 끓여줄 반찬이 한 개도 없어서 어쩐다냐? 무릎이 펴지지 않아서 병원 좀 댕기느라 텃밭에 아무것도 못 심었시야. 작년에 심어둔 것들이 있어서 샅샅이 뒤져보면 쪼매 거둘 것은 있을 것이여. 갈치라도 얼릉 지져줄랑게 텃밭에 가서 호박 좀 따 온나. 시금치랑 열무도 다 솎아서 이웃이랑 노나 먹어라. 발자국 안패이게 살살 댕겨라, 저번 때처럼 고추가지 부러뜨리지 말고.”     

 바람 소리인 듯 엄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뇌출혈로 사경을 해매는 와중에도     

 “야야~ 내가 얼릉 일어나서 대나무 가지 끊어다가 오이 모종 옆에 단단히 박어 놓아야하고, 씨감자는 썩지 않게 가끔 뒤적여 놔야 허는디. 양파랑 안 썪었는가 모르겄다. 밭일이 태산인디 언제나 나갈 수 있다냐? 내가 이렇게 누워만 있으니 애가 탄다, 애가 타. 텃밭은 쥔 낯바닥이여. 옴서 감서 풀은 다 뽑아 단도리해 놔야 헌다. 누가 보나따나 깔무짢하다고 숭잽히지 않을 것인디.”

 당신 걱정보다 텃밭 걱정을 더 많이 하시던 엄니는 이제 텃밭의 흙이 되어 계신다.  

   

 지금도 대형마트에서 깨끗이 손질되어 한 봉지씩 담아놓은 채소들을 보면 언제나 엄니의 텃밭이 생각나 쉽사리 손을 뻗지 못하고 주춤하곤 한다. 가본 적은 없지만 세계에서 손꼽힌다는 영국 여왕의 으리으리한 수십만 평 정원을, 수만 명이 몰린다는 지역 축제의 꽃동산을, 흙 밟을 일 없이 오만가지 채소들이 진열되어 있는 거대 매장을, 울 엄니의 텃밭과 바꾸자고 한다면 나는 단번에 손을 내저을 것이다.

울 엄니의 발자국과 숨결이 그대로 묻어있는 손바닥만 한 엄니의 텃밭. 그 텃밭이 그리워  나는 홀로  남의 밭둑에 앉아있다. 잘 가꾸어진 텃밭을  내려다보며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다. 울 엄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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