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막걸리를 좋아하게 된 것은 모악산 산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해발 792미터 높이의 산에 오르곤 했다.허리 지병으로 집 주변 마실길을 살망살망 걸어 다니던 내가, 막걸리에 눈이 번쩍 뜨인 뒤로부터는 주말마다 산에 올라가는 기적을 이뤘다.
사시사철 등산객으로 붐비는 산이다 보니 정상 바로 코 밑에서 간이 탁자와 양재기를 놓고서 조껍데기로 만든 막걸리를 팔았다.한 양재기에 이천 원씩 팔았는데 내가 먹어본 막걸리 중에 최고였다.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안주라고는 고추장과 멸치, 마늘쫑이전부이다. 두 시간 반 정도를 숨차게 올라온 뒤 끝에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는 '어흐!! 조타!!'소리가 절로 난다.
해발800미터 고지에서 푸른 산하를 내려다보면서 고추장찍은 멸치 한 마리와 막걸리 한 양재기는더 이상부러울 것이 없다. 딱 요, 한 사발이면 행복하다. 적당히시원하고 적당히 알딸해지는 최상의 기분. 입이 짧아서 한 양재기를 그 자리에서 다 마시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주변의 모르는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반 절 정도 남겨두고서 자리를 뜨곤 했다. 집에 와서는 두고 온 반절의 막걸리가 간절해서 다시 산에 올라가고 픈 생각뿐이다. 그 뒤부터는 꾀를 내어 빈 물통을 미리 준비하니아주 대만족이다.
날씨가 찌뿌둥한 날이나 안개가 많은 날은 간이주점은 열리지 않았다.그 서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괜한 헛걸음으로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져서 피로가 한층 더해진다.
어느여름날, 이른 시간에 산에 오르는데 뒤에서 헉헉대는큰 숨소리가들려왔다. 뒤돌아보니 큰 지게에다 한 말정도되는 술통과 집기들을 짊어 지고서 힘겹게 오르는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따로운송하는 모노레일 같은 기구를 이용하는 줄 알았다.
족히 50~60킬로가넘어 보이는 술통과집기들을 매일800미터 고지까지 져나르는 모습을 목격하고서는깜짝 놀랐다. 기분으로 마시는 한잔의 술이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건 삶의 처절한 현장이구나 싶었다. 팔고 남은 막걸리는 다시 지게에 지고 내려와야하는 수고로움을 생각하니 한잔이라도 더 팔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흐려지는 날은 탁자를 펼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지고 내려와야 하는 극한의 직업이다. 고작 이천 원짜리 장사를 위해 800미터 고지를 매일 5~6십 킬로를 짊어지고 오르내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나처럼 막걸리 한 사발 하는 낙으로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조금 벌이가 되는가 싶었다. 정상의 막걸리 장사가쏠쏠하다 생각했는지, 이천 원짜리 막걸리를 팔아서라도 생계를 꾸려야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인지중턱에 비슷한 간이주점이 생겼다.
중간마루에는넓은 쉼터가 있어서 노장년층에겐 안성맞춤이라 중년여성이파는 간이 주점은 에상 외로 인기가 많았다.구태여 막걸리 한잔마시러 한 시간정도를 더오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사람들은 정상의 윈조간이 주점을 외면했다. 점차 아저씨가 탁자를 펼치지 않는 날이많아졌다. 그리고나도 허리병이 재발하여 산을 오를 수없는 처지가 되면서모악산도 막걸리도 차츰 기억 속에서 잊고 살았다.그 뒤로 몆 년 지나지 않아정부의 집중단속으로 두 곳모두 철거를 당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산 정상에서 산하를 굽어보며 마시는 최고의 막걸리 한잔. 돌이켜보건대 그때가 참 좋은 시절이었다. 아직 삶의 열정이 있고 낭만의 막걸리가 있던 그 시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노란 막걸리처럼 빛나던 황금빛 청춘의 그. 시.절.
가끔 사람 냄새가 몹시 그리울 때면 막걸리 집에 간다. 막걸리는 마시지 않고 한 끼 때우러 간다.시끌벅적한 주변 곳곳에서 부딪치는 술잔과 "위하여"! 소리가 참 듣기 좋다. 고된 삶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허름한 막걸리 집.
모악산 정상에서 마셨던 조껍데기 술은 이제 입맛의 추억으로 남았지만 막걸리집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나는 밥을 먹으러 막걸리 집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