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춤에 핀 목련

by 파도타기

어느 날 문득
거친 사내들이 들이닥쳐
온몸을 난도질하고 간 날
나는 더 이상 공포에 떨
팔다리가 없었
묵묵히 잘려 나갈 뿐이었지
더 예쁘게 다듬어주겠다는 그 말을 믿었나 봐


​땅밑이 달궈지기 시작하고
몸에 열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부터
덜컥, 겁이 났
봄이라는데 분명 할일이 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
팔다리만 자른 것이 아니었나
나의 기억마저 잘라버린 걸까


​세상이 조금씩 일찍 밝아지고
옆집 자목련이
붉게 꽃단장할 무렵에야 치를 챘지
그래, 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거지?
그런데 꽃망울 움켜쥘 손이 없
어디서 어떻게 숨을 틔워
꽃을 밀어 올려야 할까


​허리춤이 간질간질하더니

"제가 해볼게요"
고사리 같은 손을 들고
꽃망울 만들겠다고 나
​"아직은 힘이 부족해 꽃을 피울 수 없어요"
아가야, 조금만 힘을 내렴
우주의 온 기운을 네게 모아줄게
"저도 해볼게요"
또 다른 가지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는
무능을 한탄하며 울었는데
귀한 내 새끼들, 어서 힘을 내어라


​옆집 자목련은 휘영청 눈부시게 늘어졌는데
사지가 잘려 나간 나는
겨우 허리춤 손가락 끝에
하얀 꽃망울 몇 송이 간신히 매달았


​지나가던 여인이
한참을 올려다보더니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다.


​"누가 이렇게 다 잘라놓은 거야?"


2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