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을 학습할 수 없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자기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무엇일까? 재무적으로는 현금이 제 때에 흐르지 않는 게 위험하고, 법무적으로는 관련 법규 혹은 규제에 어긋나는 게 위험하고, 프로젝트 관리에서는 유통과 납기 일정과 제작 비용이 계획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럼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하고 성장시켜야 할 기획자 혹은 PM/PO에겐 무엇이 가장 위험할까? 출근 후엔 웹/앱을, 퇴근 후엔 강의 등의 콘텐츠라는 내 제품/서비스를 키워나가는 입장에서 생각했을 땐, 단연 고객을 학습할 수 없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제품과 서비스를 출시한 뒤의 고객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과 무조건 다르게 되어있다. '누구를 대상으로 얼마에 무얼 팔아야 하는지'라는 기획의 뼈대가 모두 가설이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가설'이지, 사전 연구와 검토에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일 수 없는 스타트업에선 근거 몇 조각 덧댄 '뇌피셜'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니 해봐야만 알 수 있고, 해보면 기대와는 다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실제 고객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며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다면? 무엇이 왜 어떻게 얼마나 내 가설과 다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고, 그것이 이른바 '감'으로 하는 기획이다.
그럼 고객 학습을 저해하는 요인 또는 환경은 무엇이고 이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우선 고객 학습얼 저해하는 요인과 환경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1. 감과 직관에 의존하는 자세
무엇이 되었든 제품과 서비스의 배포, 유통, 납기 전후로 고객에 대해 학습하는 절차가 빠져있다면, 더 나아가 이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마음가짐은 가장 위험하다. 한 업계의 30~40년을 종사한 대가guru라면 고객에 대한 학습 없이 자기만의 감과 직관같은 것만으로도 필승의 전략과 전술을 펼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적인 실무자라면 감과 직관이 암만 뛰어나봐야 '뇌피셜'에 불과하다.
2. 타인의 플랫폼과 데이터에 의존하기
타인의 플랫폼에 입점하여 제품/서비스를 유통시키는 일의 한계는, 단순히 기능 혹은 UX/UI의 차원이 아니다. 궁극적인 한계와 단점은 바로 고객에 대해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컨대 브런치가 암만 대시보드를 제공하더라도, 작가는 고객 세그먼트를 분리하기 어렵고 그들의 행동 특성을 볼 수도 없다. 또는 인프런과 같은 VOD 유통 플랫폼은 구매 내역 외에는 고객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어 누가 내 제품을 사는 고객인지 알기 어렵다. 유통만 있을 뿐 고객 학습은 없다.
물론 모든 제품과 서비스가 초기부터 자체 플랫폼을 구축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너무 오랜 기간 타인의 데이터에 의존한다면, 바꿔 말해 어떻게든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방법을 구축하지 못하면 이는 분명 고객 학습을 중장기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이다.
3. 낮은 고객 학습의 빈도 (또는 긴 고객 학습 주기)
고객 학습을 진행하더라도 빈도가 너무 낮거나 그 주기가 너무 길다면 무의미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과 제품/서비스 사이에서 고객 학습은 때에 따라 대상과 방식이 다를지언정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총선 혹은 대선 출구조사도 아니고서야,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설문조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너무 긴 호흡의 프로젝트는 반응을 확인하는 시점이 늦어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리스크를 지니게 된다)
다만 이때의 고객 학습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터뷰와 설문조사, 프로토타입과 UT, MVP와 데이터 분석, A/B Test 등 일반적인 제품팀이 하는 일이 모두 고객 학습이다. 뭐가 되었든 고객 학습의 가능성을 반드시 열어두고 고객 학습의 주기를 최대한 잦게 가져가야 한다.
4. 고객을 학습했지만 이를 반영하기 어려운 제품/서비스 구조
만약 고객 학습을 적절한 빈도와 주기로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토대로 재검증하기 위해 제품/서비스에 반영할 수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가설-검증의 사이클은 결코 한 두 차례로 완성되지 않는다. 고객에 대해 학습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인사이트와 가설을 도출하고, 다시 이를 토대로 새로운 학습을 하는 반복의 연속이다.
예컨대 8주짜리 부트캠프의 커리큘럼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부트캠프가 초기에 커리큘럼을 설계하고 확정하여 이를 토대로 모집과 수업을 진행한다. 그런데 '이 커리큘럼이 이러한 고객에게 적합할 것이다'라는 것 역시 가설이다. 매일, 매주의 수업에서 현장의 반응과 피드백을 바탕으로 커리큘럼은 빠르게 수정되어야 한다. 교육 커리큘럼 역시 제품이고 가설을 검증하는 수단이다. '초기에 이렇게 설계했고 이렇게 모집했으니 이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고객 학습에 어긋나는 말도 없다. 설문조사는 하지만 다음 주에 개선된 모습을 반영하지 않으면 고객의 말이 사실인지 검증할 수 없다. 설문은 그냥 raw data를 쌓자고 하는 게 아니다.
(반면 대부분의 오프라인 제품과 서비스는 고객의 반응을 반영하여 수정할 수 없다. 실물이 있고 이 실물은 그 자체로 이미 약속된 거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오프라인 제품과 서비스는 사전 학습에 힘을 쏟는다. 더 많은 연구와 리서치, 더 많은 테스트와 검토, 더 정밀한 분석이 이를 대체한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나면, 그다음 단계는 ‘고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배우는 일이다. 문제는, 많은 팀이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고객을 학습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데이터가 없거나, 있어도 너무 제한적이거나, 설령 배운 게 있어도 제품에 반영할 수 없는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고객 학습의 창구를 열어야 한다. 아래는 환경이 열악해도 시도해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다.
1. 고객과의 ‘직접 접점’ 만들기
웹/앱 서비스든 커머스든, 고객의 행동을 데이터로만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 목소리를 들으려면 ‘대화를 걸 수 있는 통로’를 가져야 한다.
이메일·푸시: 신규 가입자에게 간단한 온보딩 설문을 넣거나, 특정 행동 후 ‘피드백 요청’ 메시지를 보낸다.
서비스 내 피드백 위젯: 화면 하단에 ‘의견 보내기’ 버튼 하나만 있어도, 예측하지 못한 인사이트를 받을 수 있다.
구매/결제 직후 후속 메시지: 커머스라면 구매 후 만족도 조사, SaaS라면 기능 활성화 직후 피드백 요청이 효과적이다.
2. 행동 데이터로 미니 실험하기
설문이나 인터뷰는 강력하지만 때로는 그저 말과 의견에 그치기도 한다. 따라서 고객의 행동을 확인하고 이를 분석할 수 있는 환경은 반드시 필요하다.
A/B 테스트: 전체 UI를 바꾸는 대신 버튼 텍스트, 안내 문구, 배치 순서 등 작은 요소를 바꿔본다.
퍼널 분석: 가입 → 핵심 기능 사용 → 결제 같은 경로에서, 이탈 구간과 전환 포인트를 파악한다.
고객 세그먼트별 비교: 고객을 나누어 동일한 변경 사항이 각각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본다.
3. 고객을 ‘모아놓는’ 공간 확보
언제든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집단이 있다면 고객 학습의 속도는 급격히 빨라진다.
커뮤니티·포럼·슬랙/디스코드 채널: 제품 고도화에 관심 있는 핵심 고객을 모아두고, 변경 사항을 사전 테스트한다.
오픈카톡방·단톡방: 규모가 작더라도 고객의 맥락과 언어를 빠르게 배울 수 있다.
VIP·베타 그룹 운영: 특정 고객층을 베타 테스트 전용 그룹으로 묶어 피드백 루프를 짧게 만든다.
4. 반영 가능한 구조 만들기
고객 학습이 아무리 잘 돼도, 이를 제품에 반영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다.
배포 주기 단축: 3개월 후에나 반영되는 개선안보다, 1~2주 단위의 짧은 스프린트가 학습 효율을 높인다.
모듈화·플래그 기능: 기능을 켜고 끄거나 일부 사용자만 적용해볼 수 있는 구조는 실험 속도를 높인다.
프로토타입/샌드박스 환경: 실제 서비스에 부담 없이 변경 사항을 시험할 테스트 공간을 운영한다.
위에서 소개한 방법이 전부는 아닐 것이며, 때에 따라 필요한 방법이 다를 테다. 때론 조금 더 고도화된 기술이 필요할 수도 있고, 조금 더 신중해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고객 학습은 완벽한 데이터 분석 환경나 기술, 어떤 완벽한 체계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은 설문, 짧은 실험, 소규모 대화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
우리의 목표는 ‘고객에 대한 단서’를 얻고, ‘가설을 검증’하며, ‘확신의 정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중요한 건 제품과 서비스를 성장시키려는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내 고객에 대해 알아가려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주어진 제약 사항 내에서 비록 아쉬운 대로라도 어떻게든 고객 학습 방안을 마련해 보려는 의지와 아이디어일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이고, 그 마음의 부재가 가장 큰 리스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