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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PO는 판을 읽는 사람이다

영화 <허슬>을 보고 떠올린 PM/PO 업무의 본질

by 플래터

“좋은 선수는 자기 위치를, 훌륭한 선수는 모두의 위치를 알지.”


영화 <허슬>에서 이 대사를 들었을 때, 잠시 화면을 멈췄습니다. PM/PO로서 하는 기획이라는 업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획자 혹은 PM/PO로 일하다보면 종종 정책 설계, 일정 조율, 문서 관리 등에 몰두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시간을 차지하는 일이기도 하고, 동료 개발자와 디자이너, 기타 이해관계자들이 PM/PO에게 기대하는 업무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는 '업무'이지 본질적인 '역할'은 아닙니다. 기획자 혹은 PM/PO는 PRD를 작성하고 이를 전달하거나 설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품과 팀, 더 나아가 조직 전체라는 맥락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전체 판을 읽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기획자이자 PM/PO라는 뜻입니다.


movie hustle cover.jpg 영화 <허슬>


판은 늘 시야 바깥에 있다


문제는 그 판이 결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회사가 커질수록, 이해관계자가 많아질수록, 그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그 복잡한 판의 구조와 흐름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묻게 되곤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일이 결국 어떤 목적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저 역시 그런 순간을 여러 번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린 결론은 단순했습니다. 남이 만들어놓은 판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차라리 내가 직접 작게라도 판을 그려보는 것이 더 확실하다는 것. 누가 정리해주지 않더라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지금의 상황과 방향을 시각화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었습니다.


전략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민망했지만


PM으로서 3년차가 되던 해, 팀과 제품의 전략, 그리고 한 해의 방향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회사 차원의 목표는 이미 주어져 있었고, 제 영역도 나름대로 정의되어 있었지만, 정작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전제 조건은 무엇인지, 현재 상황은 어떤지, 그리고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쯤인지 하나하나 정리해보았습니다. 큰 마일스톤을 몇 개 찍어두니 흐릿했던 윤곽이 점차 드러났습니다. 정밀한 전략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했지만, 적어도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다음 수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만으로도 전체 판을 보는 눈이 열렸다는 감각이 생겼습니다.


전략은 바뀐다. 그러나 시야는 남는다


물론 계획은 어디까지 계획일뿐이었습니다. 중간에 상황이 바뀌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과제가 우선순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세운 방향에서 조금씩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목표했던 지점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건 의외로 더 크고 단단한 배움이었습니다.


판을 직접 짜본 경험은 남았습니다. 그 위에서 팀이라는 장기말을 움직이며,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수를 고민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전략은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세워보는 과정에서 얼마나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는가의 문제라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습관처럼 판을 그리는 기획자


그 이후로도 중요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잠시 멈추어 판을 그려보곤 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곧바로 업무에 쓰기 위해서도 아니지만, 판을 그려보는 순간마다 흐름을 이해하는 눈이 조금씩 자라납니다.


이 일이 어떤 구조 위에서 진행되는지, 이 팀은 어떤 맥락 안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이런 질문을 던지며 판을 그려보다 보면, 단순히 내 자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바라보게 됩니다. 결국 기획자란 지금 눈앞의 화면을 넘어서, 그 너머의 판을 가늠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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