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폐아 지훈이와 지훈이 할아버지 이야기>
발령받은 지 세 해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매일 아침 8시쯤,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할아버지와 아이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모습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눈길이 갔습니다.
아이는 체격이 꽤 컸습니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있어서 언뜻 보면 6학년쯤 되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큰 아이 옆에서 할아버지가 묵직해 보이는 책가방을 들고 걸었습니다.
아이는 빈손이었고, 할아버지는 무거운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키는 작지만 허리는 꼿꼿하셔서 남달라 보였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저렇게 무거우면 아이가 들어도 될텐데, 저게 할아버지 마음이려나.'생각했습니다.
어떤 날은 아이가 길 한복판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재촉하지 않고 함께 기다려주었습니다. 아이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 할아버지도 다시 걸었습니다.
'참 다정한 할아버지시네.'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쳤습니다.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5학년 2반 담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출석부를 넘기다가 특이사항 란에 적힌 글씨를 보았습니다.
'특수반. 보호자 : 할아버지.'
이름은 지훈이었습니다.
첫 출근 날, 교실 문을 열었을 때 그 아이를 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횡단보도에서 보던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지훈이는 뒷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떠들고 돌아다닐 때도 지훈이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안녕, 지훈아."
"...안녕하세요."
지훈이는 또박또박 인사했습니다. 눈은 마주치지 못했지만, 인사는 할 줄 알았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지훈이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지훈이는 친구들과 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할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 배고파요." "선생님, 화장실 가도 돼요?" "선생님, 지우개 없어요."
간단한 문장으로, 천천히, 하지만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훈이의 공책이었습니다.
받아쓰기 검사를 하는데, 지훈이 공책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글씨가 반듯했습니다. 아니, 반듯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예뻤습니다.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바른 글씨였습니다.
일기장도 그랬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몇 줄 쓰고 그림으로 때우는데, 지훈이는 공책 한 바닥을 빼곡히 채웠습니다.
"오늘 급식으로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떡이 쫄깃쫄깃했습니다. 단무지도 먹었습니다. 단무지는 아삭아삭했습니다..."
문장이 단순했지만, 성실하게 한 줄 한 줄 채워나갔습니다.
아이 혼자서 하긴 어려웠을테고, 아마 늘 등교를 시켜주시는 할아버지께서 지도하셨을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인내가 필요할 지 알기에 할아버지께 존경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수학 시간도 의외였습니다. 계산이 빨랐습니다. 구구단도 막힘없이 외웠습니다. 문장제 문제는 조금 어려워할 때가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만큼 많이 공부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이것도 할아버지가 다 가르치신 덕분이겠지요.
'할아버지께서 정말 많이 가르치셨구나...'
4월 어느 날, 할아버지를 처음 뵈었습니다.
하교 시간에 교실로 오셔서 지훈이 책가방을 챙겨주고 계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항상 지훈이 잘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짧게 깎은 머리, 꼿꼿한 자세, 단정한 옷차림. 모르긴 몰라도 사회생활하실 때 직위가 높은 분이셨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지훈이가 정말 착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선생님, 지훈이가 혹시 다른 아이들한테 피해 주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아니에요, 지훈이 착한데요."
할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셨습니다.
"지훈이가... 화를 잘 내거든요. 아이들이 놀리면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걱정이 많습니다."
"제가 잘 살피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지훈이 책가방을 메고 지훈이 손을 잡았습니다. 지훈이가 할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지만, 할아버지는 묵직한 책가방을 당연하다는 듯 메고 걸어가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가정환경조사서를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보호자란에는 할아버지 성함만 적혀 있었습니다. 부모님 연락처는 비어 있었습니다. 학부모 상담 주간이 되어도 할아버지만 오셨습니다.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문제는 곧 생겼습니다.
5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교실이 시끄러웠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지훈이를 둘러싸고 지훈이는 화가 나서 친구들을 치려고 자기의 가방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지훈이가 화내요!"
달려가 보니 지훈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 나 돼지 아니야! 아니야!"
"애들아, 그만해. 너희가 잘못했어. 어서 지훈이한테 사과해."
놀리던 아이들을 엄하게 혼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짖궃고 못된 아이들이였습니다. 제 앞에서만 사과하고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 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 몰래 작은 목소리로 아이들은 지훈이를 놀렸습니다. 지훈이가 화를 격하게 내는 모습을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지훈이를 놀리는 아이들을 따로 불러 이야기했습니다.
"지훈이가 화내는 게 재미있니?"
"...아니요."
"그럼 다시는 놀리지 마. 알았지?"
"네..."
6월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뒤, 교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5학년 2반입니다."
"선생님, 학교 옆 파출소입니다. 혹시 반에 박지훈 학생 담임선생님이십니까?"
"네... 네? 파출소요?"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지금 학생이 여기 와 있는데요, 친구랑 다툼이 있어서요. 저희 말을 전혀 안 들어요. 말려지지가 않아요. 선생님께서 좀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호자분도 연락드렸습니다."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살면서 경찰서 전화는 처음이었습니다.
'경찰이 부를 정도면 얼마나 심하게 싸운 거지?'
파출소로 달려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래도 사태가 정리되었는지 지훈이가 파출소 안에서 씩씩거리고 서있었고, 경찰관 두 분이 아이를 둘러싸고 말리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이세요?"
"네, 담임입니다. 무슨 일이..."
"하교길에 이 학생이 친구들을 치려고 주먹을 휘둘렀는데요, 저희가 말려도 도저히 말릴 수가 없어서 연락드리게 됐습니다."
지훈이는 흥분해서 얼굴이 빨개지고, 계속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낮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지훈이, 이리 와."
지훈이는 조금 더 씩씩대다가 천천히 제 앞으로 왔습니다.
"무슨 일 있었어?"
"애들이... 애들이 자꾸 놀렸어요. 돼지래요..."
"그래서 때렸어?"
"...네."
"그건 잘못한 거지?"
지훈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경찰관이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어찌나 힘이 장사인지, 저희 둘이서 말려도 계속 다투려고 해서 애를 먹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듣네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말을 들어주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훈이에게 고마웠습니다. 여기서 멈춰주어서.
그때 파출소 문이 열리며 할아버지가 헐레벌떡 들어오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할아버지는 경찰관들께, 상대 아이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 꼿꼿하던 자세가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확인서에 사인을 하고, 상대 부모님과도 통화를 한 뒤에야 모든 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파출소를 나오면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지훈이를 더 잘 가르쳤어야 하는데..."
할아버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아니에요. 지훈이도 잘못했지만, 놀린 아이들도 잘못한 겁니다."
"선생님... 우리 지훈이가... 남들하고 다르다는 걸 압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라도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는 지훈이 머리를 쓰다듬으셨습니다.
"지훈아, 힘들지? 할아버지가 미안하다. 할아버지가 더 잘 가르쳐줄게."
"할아버지... 죄송해요."
지훈이도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그날 사건은 다른 학년 학생들과 일어난 사건이지만 저는 반 아이들도 더 강하게 지도했습니다. 지훈이를 놀리는 아이가 있으면 즉시 제재하고, 부모님께도 연락을 드렸습니다.
일 년 내내 지훈이 부모님은 한 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학부모 상담도, 공개수업도, 운동회도, 학예회도. 늘 할아버지만 오셨습니다. 왜 할아버지께서 혼자 지훈이를 돌보시는지, 부모님은 어디 계신지,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할아버지가 지훈이를 얼마나 애쓰며 키우시는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책가방을 들어주시고, 매일 저녁 숙제를 봐주시고, 한 글자 한 글자 글씨를 가르쳐주시는 그 손길을.
6학년이 되어 지훈이는 다른 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침마다 할아버지와 지훈이를 보았습니다. 지훈이는 키가 더 컸습니다. 이제는 할아버지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지훈이 책가방을 들어주고 계셨습니다. 더 무거워졌을 책가방을, 그 꼿꼿한 자세로, 그래도 당연하다는 듯 메고 걸어가셨습니다.
중학교에 올라간 뒤로는 지훈이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지훈이었습니다.
키가 훨씬 더 컸고, 어깨도 넓어졌습니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습니다. 옆에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허리가 꼿꼿했지만 걸음은 더 느려지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지훈이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지훈아!"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불렀습니다.
"선생님이야! 지훈아, 나 기억나?"
지훈이는 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어..안녕하세요."
기계적인 인사였습니다.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아! 선생님, 5학년 때...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반가워하셨습니다. 하지만 지훈이는 여전히 저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지훈아, 선생님이야. 기억 안 나?"
"...음."
지훈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잘... 지내요."
"그래, 잘 지내. 할아버지 말씀 잘 들어야 해."
"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가슴 한편이 먹먹했습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언젠가 특수반 선생님인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특수반 아이들 가르치면서 가장 서운한 게 뭔지 알아? 나중에 길에서 만나도 날 못 알아봐. 그게 제일 마음 아파."
그때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 됐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았습니다.
지훈이에게 저는 스쳐 지나간 선생님 중 한 명일 뿐이었겠지요.
하지만 저에게 지훈이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배운 아이였습니다.
큰 체구의 아이를 위해 묵직한 책가방을 들어주고, 한 글자 한 글자 글씨를 가르쳐주고, 화를 내는 아이를 다독여주던 할아버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 것인지, 저는 지훈이를 통해 배웠습니다.
지훈이가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지훈이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