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은 결국 하루의 연차를 냈다.
업무 스트레스와 과로는 그의 몸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급기야 불어난 몸집을 숨기지 못하고 몸 밖으로 마구 삐져나왔다.
몇 해전부터 두통과 불면증에 자주 시달리던 그는 명치가 답답하고 숨 쉬기가 불편하다고 말할 때가 종종 생겼다. 특별히 이렇다 할 원인이 없는 증상에 답답한 나머지 회사에서 진행하는 건강검진 때 기본적인 검진 목록 외에도 사비를 털어 뇌 MRI를 찍어 보기까지 했다. 검진 결과는 가벼운 위염밖엔 아무런 이상 징후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이 없다는 검진 결과를 받아 들고도 기분이 왠지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명치가 답답한 증상이 조금은 사라지고 잠시 마음을 놓나 했건만 몇 달 전 시작된 돌발성 난청이 청력 저하를 불러오면서 한쪽 귀가 먹먹하고 잘 들리지 않던 차에 이명까지 심해졌다. 한 달 동안 이비인후과를 다니며 약도 바꿔 보았지만 점점 더 심해 질뿐 차도가 없자 병원에선 소견서를 써주며 대학병원을 추천해 주셨다.
역시나 대학병원은 개인 병원과 달리 검진예약을 하고 꽤나 오래 기다려야 했다. 아직 2주나 남은 예약 일을 마냥 기다리기엔 이명으로 점점 더 불편해지는 그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길고 고달파 보였다.
그래서일까? 곰탱이 같이 진득한 그가 얼마나 답답했던지 신경정신의학과라도 가보겠다고 연차를 뺐다. 아. 이 사람 보통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사실이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자기야 나 정신과라도 가볼래. 지프라기라도 잡고 싶어."
요즘은 인식이 조금 유연해졌음에도 아직까지도 보통 사람들은 신경정신의학과를 찾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곳에 뿔 달린 괴물이라도 대기하고 있는 듯 그 문을 열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린다. 과거의 나를 돌아봐도 나 또한 그랬었다. 정말 절실하고 극단적일 때가 되어서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문을 열었다.
신랑은 내가 공황장애, 산후우울증으로 몇 년간 다닌 적이 있었던 병원을 가보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아내가 다녔고 또 효과를 보았던 사실이 그 문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열 수 있게 도운 듯했다.
" 나 혼자 가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자기가 같이 가줘."
신랑은 나의 첫째 아들이나 되는 마냥 보호자가 절실한 듯 보였다. 조금은 흔들려 보이는 신랑의 마음을 잡아주려 차가운 그의 손을 꼭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선 간단한 우울지수 테스트, 스트레스 테스트, 혈액순환 테스트를 진행했고, 테스트 결과를 보며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이 진행됐다.
" 많이 답답하시고 힘드시죠. 점수가 높지 않지만 미미하게 우울증 소견이 조금 보입니다. 직장 스트레스가 아주 높게 나왔네요. 스트레스 요인을 벗어나면 가장 효과가 좋겠지만 직장을 쉽게 그만 둘 순 없으니 똑같은 환경에서도 덜 힘들게 지낼 수 있게 약의 효과를 좀 기대해 봅시다. 이곳은 이명을 직접적으로 치료하진 못하고 스트레스나 우울 등의 수치를 낮추고 그로 인해 이명을 좀 덜하게 해 줄 순 있습니다. 약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신랑은 우울지수 테스트에서 우울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고 체크하였기에 본인의 결과에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하여 그리 관대하지 않다. 누구나 이 정도는 힘들지라며 나약해 보이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욱 아프게 만들곤 한다. 그러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힘든 마음을 인정해주고 안아주곤 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약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후 멍하니 설거지를 하다가 순간 오늘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문득 저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 하나가 올라와 나의 갈비뼈 안쪽을 간질였다. 이런 게 사랑이지 하는 감사한 생각은 설거지를 하던 내게 옅은 미소를 선물했다.
사랑 표현이 적다는 투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구걸하며 확인하던 애송이들은 어느새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놓고, 이젠 서로의 건강을 챙기며 아픔까지 함께 하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부부란 서로의 흠을 꼬집어 고치려 하기보단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인생이란 저울 위에 결코 어느 한쪽만이 처지지 않게 균형을 맞춰 길고 긴 인생에서 서로의 옆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동반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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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램(가수-노사연)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때문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 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 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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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엔 뽀얀 사골국을 우려낸 듯 이런 깊은 사랑의 노래를 들으면 당연한 듯 부모님이 떠오르곤 했다. 요즘의 나는 이런 진국의 노래를 들으면 부모님보다도 내 옆의 동반자가 먼저 떠오른다. 그럴 때면 어느새 나도 저만치 앞서 걷는 부모님의 족적을 따라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걸음을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 가는 겁니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하여 그 모든 부부들이 함께 늙어가진 못한다. 함께 늙어 간다고 한들 서로가 딱 좋게 익어가는 건 더욱 힘든 일이란 걸 살아가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어느 한 사람의 노력만 부족해도 균형은 무너지고 언젠가 내 옆자린 영원한 공석이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부부는 서로의 노력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께 익어간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아픈 배우자의 손을 잡고 동행할 수 있다는 것,
함께 익어가는 사람이 내 옆에 존재한다는 그것에 나는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