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그 겨울, 나는잿빛박스 안에갇혀 밤샘노동을 하고 있었다. 눈앞의기계가 빠른 속도로 HDD(보조기억장치)의 기본 틀을 조립해내밀면,나는나머지 반을 조립해 완성된 완제품들을 박스에 진열했다.
처음그렇게복잡하고 어려웠던 과정들은 더 이상 사고의 도움 따윈 필요하지 않다는 듯 금세 손에 익어 있었다. 텅 빈 눈이 허공을 헤맬 때마저기계의 일부가 된 듯,반 기계가 된 손이 자동으로 전동을 움직여 제품을 완성하곤 했다.그렇게 일이 손에 익어, 가속도가 붙을수록더 편해져야 할 내육신은이상하게 요령이 늘 수록더욱불편해졌다.
제품을 완성시키기 전,CD 한장마다 내 '사고' 몇 점으로 용량을 채워 닫고 있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게 아니었다면 왜 완성된 제품 박스들이 쌓일수록, 꼭 그만큼 나의 시각과 뇌의 메모리 용량은 반대로줄어드는 느낌이 들었을까.
그렇게 밤새 수량을 더 많이 뺀 날은 눈 안이 텅- 비어 시선에 비친 모든 세상이 흐리멍덩하게 보이는착각을불러일으켰다.그런 날이면 나는 쨍한 햇볕 아래서 뜨거운 자외선 샤워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흐리멍덩해져 버린 뿌연머릿속과 눈 빛이 다시 반들반들하고선명하게 빛이 날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가끔 박스 안 공기가 모두 소진된 듯 숨이 막혀 오는 날이면, 회색 철창을 마스터키로 삑- 하고 열고 나와 상점과 음식점들이 즐비한 탁 트인 번화가를 걸으며 마음을 환기했다.
당시의 여느 번화가가 그랬듯, 끊기지 않고 줄지어 달리는 유행가들이 골목을 휘감듯 가득 채웠고,그중 유난히 귀에 와 박히는유행가가 있을 때면, 몇 날 며칠 같은 곡만 되새김질하듯 입 안에두고 오물오물 곱씹곤 했다.
그대가 온다
티미
봄을 기다리듯
그대를 기다린다.
그대는
따뜻한 온기.
그대는
설레는 색채.
그대는
피어나는 생명.
그대는
대지의 온화함.
그대가 온다.
봄이 내게로 온다.
- 브런치북 '시시때때로' 중-
향이 배인 노래
아이들과 내가 유난히 자주 감기에 걸렸던 지긋지긋한 작년 겨울. 그 겨울은 느린 듯 빠른 걸음으로, 벌써저만치에서뒤태만이얼핏 비치고,어느새 봄은 완연한 미소를 띠고, 한 낯 가벼워진 옷차림으로내게 와있었다.
봄이란 생각만으로 조금은 산뜻해진 마음의 아침.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뒤늦게 아침 식탁을정리하며 습관 적으로 노래를 틀었다.여전히 최신 유행가 보단 오래된 노래들을 좋아하는 나는, 요즘도리메이크 리스트 곡들로 자주 찾아 듣고 있다.그렇게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자유분방하게 그릇 위를 춤추던 현란한 거품질이순간 일시정지 화면처럼멈췄다. 휴대폰 스피커로 흘러나오던 노래를 타고 열아홉 그해 겨울이, 상영된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에 재현됐다.
나도 모르게하던 동작을 모두 멈추고, 멍하니 영상을 음미한다. 그 겨울의 온도,그 겨울의 색채와 냄새가나의 오감을 통해 되살아 났다. 봄 안에 살고 있는 내가, 순식간에 봄 안의또 다른 계절로 옮겨가 잠시 머문다. 느껴 본 사람들만이 공감할 것이다. 노래에도 색채와 온도 그리고 향이 있으며저마다의 특색도 다르다는 걸.
노래에남겨진 자국들은 무엇보다 짙다. 그래서, 어느 시간어느 때에 들어도, 오랫동안 향을 피워깊이 배인 냄새처럼민감한코 끝을 다시 자극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