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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다 Jul 08. 2024

달리기, 그 첫 번째 이야기


이 나이에 나는 왜 갑자기 달리려고 하는가?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 나이에 나는 어떤 계기로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는가? 이렇게 정정하는 것이 옳겠다.


나는 1년 넘게 수영에 깊이 빠져 있었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일이 있어도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서라도) 매일 점심마다 꾸준하게 회사 근처 수영장 도장을 찍었다. 심지어 집 근처에 등록해 놓은 [화, 목 저녁 강습]까지 겹치는 날이면 하루 두 번 수영을 하기도 했다. 주말은 주말대로 애들과 함께 수영장을 찾아 자유 수영을 했다. 이렇게 진득하니 질리지 않고 몰두한 운동은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시간과 마음을 쏟은 덕에 실력도 제법 늘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그날따라 저녁 수영 강사가 유난히 힘든 프로그램을 주문했는데 평소 내 실력보다 수월하게 소화가 되어버린 날이었다. 자신감이 차 올랐다. 이제 연수반 프로그램을 소화하고도 숨을 헐떡이지 않는 나 자신이 뿌듯했다.


복작거리는 수영장 샤워실에서 한껏 뽕에 취해 거만한 표정으로 샤워를 시작했다. 그런데 선반에 올려놓은 샴푸가 갑자기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평소와 다르게 근거없는 뽕에 취한 탓일까? '떨어지는 샴푸가 투~~~ 우 욱 하면서 느리게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의 내 운동신경은 굉장히 예리하고 날이 서 있다고 느껴진다. 슬로모션으로 떨어지는 샴푸 따위는 당연히 잡을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2미터도 점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라는 생각과 함께 무사가 칼을 빼 듯 순식간에 손을 뻗었다. 허공을 가른 내 손가락이 샤워실 벽 타일과 정면으로 조우했다. 바사삭 이었을까? 뚜둑 있었을까? 느낌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입에서 "끄아아악~!" 하는 체신머리는 없는 경박하고 우렁찬 신음소리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내 왼쪽 가운데 손가락은 골절되었다.




깁스를 한 손가락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깁스를 했으니 당분간 수영장을 기웃거리는 것은 어림도 할 수 없다.


'이 참에 쉬어가자'며 달래 봐도 그 순간뿐이다. 애써 자리 잡은 운동 습관이 사라져 버릴까 조바심이 난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동도 트기 전 새벽에 아파트 헬스장을 향한다. 손가락 깁스가 제법 크기도 하거니와 찌릿찌릿하고 욱신한 통증도 간헐적으로 찾아오기에 바벨과 덤벨을 잡고 뭘 해보겠다는 마음은 이내 접는다.


방향없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일렬로 늘어선 러닝머신들이 보인다.

아직은 이른 새벽시간이라 듬성듬성 비어 있는 러닝머신이 마치 새초롬하게 나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달려봐야겠다.' 그때였다. 달려야겠다고 생각이 든 시점이.


나는 본래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하고 말고의 단계까지 달리기를 경험해보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웨이트 운동 하기 전 몸을 데우는 용도로 5분-10분 러닝머신을 훑은(?) 경험만 있을 뿐이었다.(그럴 때도 빠르게 걷거나 1~2분 뛰고 1~2분 쉬는 인터벌 방식으로 두어 세트를 할 뿐이다.)


그런 나에게 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손을 다쳐 수영을 못하니 하체와 심폐운동을 겸할 수 있는 달리기가 제격이야. 달리기로 수영을 대체하겠어'같은 합당한 이유가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냥! 달려야겠다. 달려봐야겠다.'는 단순하고 막연한 의지가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을 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비장한 걸음으로 러닝머신 위를 오르고 있었다.




속도 6.5KM를 놓고 걷기 시작했다.(6.5KM는 내 기준 적당히 힘을 줘서 빠르게 걷는 속도다.) 운동할 때 5분 이상의 충분한 워밍업은 필수다. 하지만 나같이 성격 급한 사람은 2분간 워밍업 흉내만 낼 뿐이다.

2분을 걷고, 대뜸 속도를 8.5KM로 높인다. 나는 지난 1년 넘게 수영을 꾸준히 해왔다. 모르긴 해도 체력이 바닥은 아닐 것 같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내면 어딘가에서 치고 올라온다.


가볍게 ''다는 느낌이 의외로 경쾌하다. 다리도 생각보다 가볍고, 숨이 가빠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20분을 그렇게 달리고 있다. 여전히 숨은 가쁘지 않다. 이대로라면 40분도 달릴 수 있겠다 싶다. 내친김에 계속 달려보기로 한다. 얼굴로 땀이 흘러내린다. 맥박과 심장박동이 빨라졌음이 느껴지긴 하나 아직 숨이 가쁘다의 단계까진 도달하지 않았다. 40분을 지나고 있다. 수영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거칠었던 호흡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안정되는 구간이 온다. 그리고 자신만의 일정한 리듬을 갖게 된다. 그 리듬감이 달리기에서도 느껴지고 있는 것 같다. 적당한 심박과 호흡, 굳이 애쓰지 않아도 한 발 한 발 내디뎌지는 다리들이 '너 지금 리듬 탔구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리듬과 함께 50분을 꼬박 달렸다.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첫 달리기 치고 50분이면 제법 잘 달렸다는 생각과 앞으로 계속 달리려면 첫날부터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두 다리를 세웠다.


8km! 만족스러운 거리를 달렸다. 기대치 이상의 거리를 달린 셈이다. 상의가 푹 젖을 정도로 땀이 흘렀다. 수영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개운함과 상쾌함이 밀려왔다. 첫 달리기를 무사히 완주했다는 안도감과 만족감과 함께.




첫 달리기 쾌감은 여운이 크게 남았다. 기껏해야 조깅인지 러닝인지 애매한 영역의 뜀박질 한 번이지만 계속 그 맛(?)이 생각났다. 그날 이후로 매일 새벽 착실하게 7~10km 내외를 착실하게 달렸으며, 달린 거리와 시간을 일기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기의 상당 부분이 달리기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짐과 동시에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유튜브를 보다가도 '달리기'란 콘텐츠가 나오면 쉬이 흘려보내지 못했다. 알고리즘의 미로에서 우연히 찾아든 책 리뷰 영상에서 무라카미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이 언뜻 소개되었다. 이 책의 리뷰 영상은 아니었고, 이 책이 괜찮다 정도의 코멘트를 남기고 흘러가는 수준의 소개였음에도 불구하고 귀가 활짝 열렸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이제 좋아하기 시작한 '달리기'가 한 문장에 담겨있다. 따라서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이었다. '예스 24는 당장 그 책을 나에게 들고 오렸다!' 호령하며 서둘러 책 주문을 마쳤다. 도착한 책을 정말이지 단숨에 읽어냈다.


이 책은 달리기를 축으로 한 소설가로서의 하루키 회고록이다. 하루키는 스스로를 작가이자 러너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 '러너'라는 표현이 말도 못 할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저 "달리는 자"일 뿐인 그 단어가 마치 "전사"나 "영웅"같다고 느껴졌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무언가를 읽고 싶고, 쓰고 싶어 지며, 달리고 싶어 진다. 읽고, 달릴 준비가 된 시점에서 절묘하게 이 책을 접한 게 행운처럼 여겨졌다. 달리기 뽕이 한껏 차 올랐다. 빨리 일어나서 달리기를 하러 가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이 책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내 달리기 열정에 한가득 기름을 부운 셈이었다.




이때부터의 나는 스스로를 "러너"라며 세뇌하기 시작했다. '난 러너다. 고독하게 달리는 러너다.'(러너가 될 것이다) 고작 몇 번 달린 나는 이미 러너로써의 직책을 스스로 부여하고 있었다. '비록 아직은 러닝머신(트레드밀)에서 소심하게 뛰고 있을지라도 나는 러너다.' 주문을 외고 뛰면 나 자신이 제법 멋있어 보였다.


호흡을 안정시키는 것에 집중하며 뛰다 보면 내 숨을 오롯이 느낄 수 있고 그 감각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든다. 얼마 전 흉내 내 본 명상의 효과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여러 가지 잡념일지 상념일지 모를 생각의 파편들이 둥둥 떠다니기도 한다.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는 것들도 있고, 출근길까지 이어지는 생각 조각들도 있다. 회사에 와서 이 생각들 중 남은 것들을 건져 내서 일기에 대충이라도 기록하며 정리했다. 달리기가 몸과 심장의 근육뿐 아니라 정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매우 놀라운 순기능이지 아닐 수 없다.


수영할 때는 자세 교정에 집중하느라 머릿속에 별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는데 달리기는 하는 도중에도 생각이라는 것들이 내 뇌를 자극하고 있단 사실이 마치 공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을 준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러닝의 효과" "러닝화" "마라톤" 콘텐츠를 잦은 빈도로 나에게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수영 영상들이 달리기 영상으로 전면 개편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엔 '달리기로 바뀐 인생, 10분만 달려도 바뀌는 건강' 등 달리기 주제의 영상들들로 시작했는데 섭렵하다 보니 어느새 제목만 보고도 나와 결이 맞는 콘텐츠들을 바로 골라낼 수 있을 경지에 이르기까지 관련 영상에 빠져있었던 거 같다.


이렇게 나는 "러너"라는 뽕에 취해 달리기 덕후로 조금씩 여물어가는 중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나는 '성장'과 '성취'라는 것에 무관심했다. 어리석게도 개념도 안 잡힌 '성공'을 쫓는데 급급했다. 그러던 나에게 일 년 전부터 취미란 것이 하나씩 생겨나고 이를 통해 조금이지만 성장, 성취의 맛이 뭔지 알아가고 있다.


수영을 시작으로 책 읽기가 더 해졌고, 책을 읽다 보니 뭐라도 써보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 최근엔 일기 쓰기도 시작한 터였다. 수영, 독서, 일기 이 세 개의 취미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길,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근력이 돋아나길 바라면서 이 과정을 지나는 중이었다.


그러는 중에 불현듯 '달리기'를 만났고, 나는 달리기에 흠뻑 빠지고 있다. 달리기는 운동과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점이 이미 가지고 있던 취미와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현재 내가 느끼는 달리기의 부분적인 매력이다. 앞으로 더 많은 매력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고 싶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감에 따라 러너에 걸맞게 내 몸은 밸런스를 맞출 것이고, 필요한 근력들은 조금씩 단련될 것이다. 또한, 내달린 거리와 빨라지는 속도에 비례해서 '성취감'이 따라 붙을지도 모른다. 장거리를 달리다 보면 "몹시 힘듦"도 마주할 수 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내심이 길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달리기 위해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강한 의지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가쁜 숨을 몰아쉬다 보면 내 심장이 건강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고, 때로는 안정된 호흡 속에서 머릿속에 오가는 복잡다단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같은 달리기의 매력을 생각하면서 '달리기'와 '달리기를 하는 나' 사이에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떤 애착을 조금씩 쌓아가는 중이다.




성장하는 사람과 안주하는 사람을 나누는 첫 번째 기준은 배우고자 하는 의지 유무이고, 두 번째 기준은 배움을 지속하느냐의 여부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나는 분명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감히 확신한다. 지속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의 열기를 꺼뜨리지 않고 잘 살려 나가보고 싶다.


포기하지 않고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스스로에게 "진짜 러너"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하는 바램을 담아두며.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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