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이 글은 소시오패스 직장상사 밑에서 오늘도 온갖 고초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직장인 분들에게 드리는 위로와 공감의 글이 아닌, 제 스스로가 겪은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기록이자,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고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밝힙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 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크면 클수록 좋은 것들이 있다. 집, 차, TV 등등... 보통은 내가 소비하거나 소유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되며, 이러한 것들을 통해 나의 부를 직,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이기도 하다. 부의 크기 또는 부러움을 유발하는 크기들과 맞물려 크기가 커질수록 나의 효용가치 또한 커지기도 한다. 그렇게 큰 것들을 좋아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소비의 시대, 일면 당연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는 좀 다른 것들까지도 커야 하는 인물이다.
회사에는 정말 많은 회의실이 존재한다. 회의실이 많아 회의가 많은 건지, 회의가 많아 회의실이 많은 건지는 선후 관계가 아직 불분명하지만, 25층부터 32층까지 각 층별로 중, 소규모 회의실이 5~6개씩이나 위치해 있다. 또한, 공용공간인 32층과 CEO 집무실이 있는 31층에는 별도의 대형 회의실도 자리 잡고 있다. 통상 CEO 집무실과 붙어 있는 대회의실은 CEO 보고 외엔 잘 이용하지 않아 유명무실한 편이고, 각 사업부별로 큰 회의가 있을 경우 대부분 32층에 있는 컨퍼런스룸을 사용하고 있다.
컨퍼런스룸은 회사 내 가장 큰 회의실로 외부 고객사가 방문하거나, 사업부별 실적 발표회 등 큰 이슈가 있을 경우 또는 해외 법인들과의 다자간 화상회의 등에 사용되는 경우 말고는 사실 잘 이용되지 않는 회의실이다. 참여자 간 거리가 있어 마이크를 사용해야 대화가 잘 들리는 등 큰 규모로 인해 상호 간 의사소통에 제약이 있는 편이기 때문이다.
5월 4일 오전 10시 (30층 사업부 내 중회의실)
"이 팀장, 우리 리더들이 주간단위로 모여 사업부의 현황과 미래 준비를 논하는 회의에 이 정도 규모의 회의실이 적합한가요? 미래 사업을 준비한다는 사람들이 이 정도 배포밖에 안되나요?"
지난 노동절날 불어 터진 짜장면 사태로 격분하고 일어선 조 상무는 아침부터 사업부 내 팀장들이 모인 주간회의에서 회의실 크기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지금 회의실도 약 25명이 사용 가능한 회의실로 수도권 지역 팀장들 10명, 조 상무, 기획팀 인원 5명을 합쳐도 사실 공간은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까려고 하면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깔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조 상무이기에 이 정도 회의실은 그에게 성에 찰리 없었다.
"앞으로 우리가 준비한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올해 내에 우리 사업부 인원은 2배 이상 늘어나야 합니다. 당연히 리더 자리 또한 2배 이상 늘어날 겁니다. 그럼 지금 이 정도 규모로는 택도 없는 거 아닌가요? 앞으로는 회사 내 가장 큰 회의실에서 주간회의 진행하겠습니다.
이유불문! 가장 큰 회의실에서 회사에서 가장 크게 성장해야 할 우리 사업의 미래를 논의하겠습니다! 이 팀장, 이 자리는 오늘 여기서 해산하고, 가장 큰 회의실 수배가 되면 그때 다시 회의를 소집해서 알려주세요. 오늘 이 자리는 격에 맞지 않아 더 이상 회의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회의실의 크기를 사업의 미래 크기로 연결하고, 다시 이를 회의 자리의 격식으로 연결하는 신박한 논리를 들어 불쾌함을 표현하고는 그대로 회의를 끝내버렸다. 아침부터 모인 20여 명의 팀장, 팀원들은 이제 이러한 일들이 일상이라는 듯 별다른 불평도 없이 각자의 자리로 자연스레 돌아갔다. 오늘 논의가 되었어야 할 신규 제품 론칭 일정과 후속 마케팅 일정/예산 논의들은 자연스레 대회의실 예약 스케줄에 맞춰 뒤로 밀리는 황당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유 차장, 총무팀에 협조 구해서 32층 컨퍼런스룸 매주 월요일마다 오전 시간 Full로 예약해 달라고 해라. 혹시 특별한 외부 고객 일정이나, 다른 사업부 일정 있을 경우엔 사전에 알려달라고 하고. 되도록이면 월요일 오전은 우리 사업부가 쓰는 방향으로 해달라고 해. 서로 얼굴 안 붉히고 일 편하게 하려면 협조 좀 해달라고 잘 말해봐."
그렇게 무언가 불편한 부탁과 협조들은 어느샌가 다 유 차장님 몫이 되었다. 조 상무가 화를 내고 무엇인가를 시키면, 그 일은 언제나 그대로 토스되어 유 차장님에게 떨어졌고 이후, 해결된 결과에 대해 서만 이 팀장은 보고하기 바빴다.
32층 공용시설 내 컨퍼런스룸 예약은 유 차장님의 설득과 회유, 그리고 주변 인맥들을 동원한 반협박 등을 통해 하루 반나절만에 해결되었다. 연말까지 월요일마다 회의실을 예약해 놓은 것에 대해 다른 사업부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그런 불만을 하나하나 소명해가며 조 상무의 변죽을 감당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양해를 구하거나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뒤, 5월 11일 오전 10시 (32층 컨퍼런스룸)
"이 팀장,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업부의 리더들 면면하며, 앞으로 채워나갈 나머지 많은 리더들의 자리까지 이곳에서 한눈에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또한 이런 대형 회의실에서 중요한 Agenda들을 논의하는 습관을 들여야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제가 괜히 빨리 상무를 단 게 아닙니다. 임원처럼, 대표처럼 행동하고 그에 걸맞은 격식을 차려야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겁니다. 자, 오늘 회의 진행하시죠, 이 팀장."
컨퍼런스룸 상석에 기분 좋게 앉은 조 상무는 회의 내내 긍정적인 리액션으로 발표자들의 공로를 추켜세우기에 여념 없었다. 제품 개발 일정 지연 이슈, 다소 민감한 마케팅 예산 등에 대해서도 개발팀, 마케팅팀 팀장들이 어렵게 운을 떼며 보고 했으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부족한 자원에도 고생한 것들에 대해 독려하며 빠른 일정 Catch-up을 주문할 뿐이었다. 회의실 크기 문제를 해결한 그날의 회의는 그렇게 별 무리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이 났다.
큰 회의실과 상석 자리가 주는 안락함에 그는 그저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리더들은 그가 기분 좋음에, 다들 무사히 보고를 마쳤음에 안도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들 마음 한구석엔 불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 또 조 상무의 기분이 다운될지, 어떤 이유를 들어 변죽을 울리고, 했던 말을 바꿀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컨퍼런스룸에서 진행한 하나의 회의를 무사히 넘겼음을,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별 탈 없이 넘겼음을 위안 삼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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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Photo by Benjamin Child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