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이 글은 소시오패스 직장상사 밑에서 오늘도 온갖 고초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직장인 분들에게 드리는 위로와 공감의 글이 아닌, 제 스스로가 겪은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대한 기록이자,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고 그들과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타산지석의 사료'임을 밝힙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 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유통 사업에서 물류센터는 핵심자산 중 하나다. 물류센터의 최적 입지 조건을 꼽으라면 통상적으로 1) 사통팔달한 위치, 2) 주요 지역거점 물류망(RDC)으로 연결 가능한 고속화 도로망 2가지로 압축된다. 회사의 미래 먹거리로 낙점한 B2C 유통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물류기획팀은 근 1년 동안 새로운 물류센터 확보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로 5월 1일이면 덕평지역에 신규 중앙 물류센터(CDC)가 오픈할 예정이다.
새로운 물류거점이자, 자신의 B2C 사업 핵심 자산이 될 물류센터 오픈식에 조 상무가 빠질 리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리에 구성원들을 한껏 끌어모아 패거리로 참석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노동자를 기리는 5월 1일에 우리는 덕평에 자리한 신규 중앙 물류센터로 출근했다. 상무 1명, 팀장들 15명, 기획팀원 4명에 달하는 쓸데없이 많은 인원 참석으로 인해 방문 시작부터 물류기획팀의 핀잔을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조 상무는 의기양양하게 오픈식에 참석했다.
20년 5월 1일 노동절, 오전 10시 (덕평 물류센터)
"우리 B2C 사업부의 핵심자산이 될 새로운 물류센터 오픈식에 이렇게 우리 사업부 모든 리더들과 함께 할 수 있어 감개무량합니다. 올해 1월 우리 사업부가 정식 출범한 이래 숨 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4개월입니다. 이제 한 달 뒤면 이 큰 물류센터에 우리가 새롭게 준비한 다양한 제품들이 가득 들어찬다고 생각하면 전 너무나 설렙니다. 우리의 차별화된 제품과 이를 완결시켜줄 세심한 서비스에 환호할 고객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우리가 새롭게 그려나갈 미래 모습에 여러분과 함께라면 전 두려울 게 없습니다... (중략)"
물류센터 오픈식에 CEO 대신 축사를 자처한 조 상무는 30여 분간 장황하게 자신이 꿈꾸는 B2C 유통 사업의 미래 모습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한 리더들의 노력과 헌신을 당부했다. 이제 막 오픈한 물류센터라 아직은 어수선한 상태였고, 새 건물 냄새가 진동했지만 의전에 민감한 조 상무는 의외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픈식 장소가 물류센터 내부이다 보니 간단하게 축사 및 기념사진 촬영 이후, 가볍게 다과 정도를 곁들인 후 공식행사는 오전 중 끝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삿날에는 짜장면을 먹어야 한다'는 조 상무의 개똥철학으로 인해 우리의 오전 퇴근은 물거품이 되었다. 물류센터 한쪽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 20여 명이 넘게 옹기종기 모여 주변 중국집을 검색하고, 한쪽에서는 미리 메뉴를 고르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마땅한 배달 중국집이 없어 근처 식당으로 이동해서 먹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삿날에는 배달해서 짜장면을 먹어야 한다는 조 상무의 고집과 막무가내 논리를 꺾을 팀장은 아무도 없었다.
물류기획팀은 본인들 근무지에 와서 첫날부터 당연한 듯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조 상무의 패악질에 일찌감치 자리를 비켜주고 사라졌다. 그렇게 B2C 유통사업부의 상무 1명, 팀장들 15명, 기획팀원 4명 도합 20명만 남아 짜장면 10개, 짬뽕 10개, 탕수육 5개, 서비스 군만두 5개를 살뜰하게 주문했다. 거리가 약간 있는 곳이긴 했지만 중국집 사장님은 예상치 못한 대량 주문에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최대한 빨리 배달해드리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꽤 많은 음식양에도 30여 분 만에 음식들은 물류센터 내 사무실로 배달되어 왔다.
주문한 음식 양도 많았고 배달 거리도 있는 편이라 도착한 음식들은 약간 불어 있었지만, 시장이 반찬이기도 하고 빨리 먹고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다들 군말 없이 음식들을 뜯기 바빴다. 그리고 음식들을 절반쯤 뜯고 있을 무렵 우리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깨달았다. 단무지, 김치, 양파, 춘장까지 빠진 것 없이 음식은 다 배달되었지만 정작 젓가락이 없었다.
다들 충격과 공포에 빠져 말도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있을 즈음, 왠지 직접 주문을 했던 본인의 잘못이 좀 더 켕겼던 이 팀장이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려고 나섰다.
"상무님, 사무실 뒤져보면 남는 젓가락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찾아보겠습니다. 유 차장! 얼른 중국집에 전화해서 젓가락 가져다 달라 그래, 아니면 근처 사 올만한 곳 있나 찾아보던가, 얼른!"
누구보다 조 상무가 먹는 것과 음식의 맛에 민감함을 잘 알고 있던 이 팀장은 서둘러 사무실 내 젓가락을 수소문하고, 팀원들에게 근처 음식점이나 편의점에서 젓가락을 공수해올 것을 명했다. 그렇게 유 차장님은 중국집으로 긴급 연락을 했고, 나와 백 과장은 근처 편의점을 찾아 차를 몰고 이동했다.
10여분쯤 흐른 뒤,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젓가락을 조 상무와 참석한 여러 팀장에게 나눠주고 있을 무렵 중국집 사장님도 부리나케 젓가락을 들고 다시 찾아오셨다. 연신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사장님에게 조 상무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괜찮다고 음식이 아주 맛있어 보인다고 안심시키며 빨리 가게로 돌아가시라고 권했다. 사장님이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가게로 돌아간 뒤, 조 상무는 아무 말 없이 불어버린 짜장면을 비비다가 그대로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팀장, 내가 의전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지만 여기서 불어 터진 짜장면을 먹어가며 무슨 사업의 미래를 논하겠습니까, 이렇게 준비성이 없어서야 여러분들은 미래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들 내일 사무실에서 봅시다!"
'이사한 날에는 짜장면을 먹어야 한다'던 조 상무는 불어 터진 짜장면에 짜증이 극에 달했고, 비비던 음식을 그대로 팽개친 채 나가버렸다. 안절부절못하던 이 팀장 역시 부리나케 조 상무를 따라나갔다. 그리고 남겨진 팀장들 14명, 기획팀원 4명 도합 18명의 사업부원들은 불어버린 짜장면, 짬뽕과 식어버린 탕수육, 군만두를 몇 젓가락 먹은 뒤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전 세계의 노동자를 기리는 5월 1일, 우리는 그 노동자의 대열에 끼지 못했나 보다. 휴일임에도 무급 노동을 위해 비자발적으로 참여한 팀장 및 팀원들은 조 상무의 고성을 들으며 대충 점심을 때운 뒤, 물류센터 주차장에 모여 연신 담배를 피워대다 하나둘 사라졌다.
내일부터 조 상무가 또 얼마나 쥐 잡듯 잡을까, 어떤 것들을 꼬투리 잡아 고성을 지를까,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지만, 어쨌든 목표한 오전 퇴근은 달성했으니 그걸로 된셈쳤다. 내일의 걱정은 일단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퇴근했지만, 마음 한편은 계속 찜찜하고 불안했다. 그리고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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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Photo by Hannes Egl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