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말랭이

-소월삼대목 35-

by 김병주

-백기행에게-



한겨울 예로부터 쭉 전해 내려오는 단군 할배 전설 같은 한겨울 집집마다 팥죽 탓에 오갈 데 없는 귀신들 도깨비들 다 데불고 앉아서 살 맞대고 지새운 동지 동지 곰동짓밤도 훌쩍 지나고 외할머니가 또 한 박스 고구마말랭이 멀리 남도 천리길 맞은편에서 이야기 고플 때 시골 내려오고플 때 심심하거나 힘들 때 쟁여두고 오래토록 먹으라고 보내오시면 나는 못나도 한참 못나게 생겨 먹을 나도 덩달아 못나게 되는 오래되어 흙색 속살 밖으로 곶감처럼 허연 당분이 올라온 잘 말라비틀어져 오개오개 모여있는 차지고 말캉말캉한 고구마말랭이 두어 개 손 위에 얹어놓고 보다 보면 관솔불처럼 생각이 모락모락 나기를

아침 같은 산윗탈이 물을 잔뜩 머금어 군청에 일도 있는데 우리 집 고구마 농사 봐준다고 일부러 늦게 남은 이 동네 흔치 않은 농학 박사라는 무뚝뚝한 정 세환(使喚) 아저씨가 트랙터로 흙밭 뒤갈아엎어 숨 트여줄 때마다 뻘처럼 발이 푹푹 빠져드는데 산을 닮은 외할머니도 부모를 똑 닮은 두 외삼촌도 남편들을 닮는 외숙모들과 이모 엄마 그리고 그 티도 없는 애들도 열심히 트랙터가 지나간 고랑 그 뒤를 좇으며 누렇고 퍼런 박스와 다라이에 곤히 자던 고구마들을 뽑아 담고 윗고랑부터 한 줄 한 줄 아랫탈까지 육중한 기계가 지나가면 온 외가가 거기에 자진모리장단으로 빨리빨리 후딱후딱 호맹이질을 하고 맨장갑으로도 하고 박스를 건네받고 캐낸 고구마들을 한 줄로 쭉 늘어 볕에 말리며 아낙들 허리 굽는 소리와 저기 옆 밭치서 그렇게 청청하고 그윽할 수가 없는 들깨 도리깨질할 때의 향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며 홍갈색 두럭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이고 외할머니는 또 땅이 호랭이 물어가도록 질다며 그러게 비 오기 전에 두럭에 비니루를 걷는 게 아니었는디 하시며 바삐 호맹이를 놀리실 때마다 제각기 못난 고구마들만 그득그득 쌓여가는데 나는 손에 일이 통 익질 않아 애들 하는 것만도 못하다고 꾸지람만 억수로 듣다가 바구니를 옮기고 나르고 하는 동안 꼬리뼈와 장화 속 새끼발톱이 씨근씨근 아려오며 문득 외할머니의 마디 굵은 손을 가만히 붙잡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동안 밭뙈기맹키로 큰 쟁반 가득 포도송이 썰은 참외 쑥개떡 콩고물 인절미 새참으로들 나오고 이게 이렇게 맛이 좋았나 하며 주린 배 채우는 동안 정오가 지나면 중천 해에 잘 마른 고구마들 못생긴 놈 잘생긴 놈 큰놈 작은놈 상처 난 놈 안 난 놈 가려내며 이런 놈들마저 잘나고 못나고 따져 가려내야 한다는 것도 못 할 짓이구나 하고 괜시리 생각도 해보며 십 키로 이십 키로 박스를 굼뜨게 채워가면 외할머니는 또 박스에 적은 키로 수보다 일이 키로씩 더 담으시면서 이게 다 사람 정이요 양심이라 말씀하시는데 이러나 저러나 아직도 일은 익질 않고 내리는 오후 햇살에 다 마른 밭기운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며 앞길처럼 밑도끝도 없이 쌓인 고구마들을 아프도록 문대고 또 문대며 털 때마다 틉틉한 모래먼지가 매캐하게 일며 목덜미가 그뭇하게 타들고 어른들은 여기저기 두럭에 남은 고구마가 왜 이리 많냐며 우리가 가고 나면 할머니가 다시 혼자 밭을 매실지도 모른다는 말에 퍼뜩 죄스러워지고 그렇게 입에는 쓴내 옷 속에 땀은 허벅허벅 차고 새파란 하늘도 에워싼 산도 불현듯 그냥 아름답고 내 손 느린 것이 미워하지 않으려 해보는 동안 해도 집에 가려는지 달이 그 하얀 달이 중천에서 기다리는 동안 윗고랑 아랫고랑 정리하는 일도 결국은 끝나고 자루에 어디에도 뽑히지 못한 가련한 것들을 퍼담아주던 일도 끝나 아래에서 기다리는 털털대는 포터에 남은 힘 다 써서 박스들 포대들 다라이들 쌓아 싣고 터덜터덜 외갓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환삼덩굴 사우질빵 쑥부쟁이 아욱 당아욱 초롱꽃 지칭개 호박꽃 도라지꽃 그득하게 피어 흔들리는 사이로 다시금 깨 향기가 진하게 퍼져오며 오늘 하루 그래도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며 꽃 따라서 흔들리던 그 여름의 뒷풍경 그 순한 초저녁 어스름이 눈에 선선해서

또 내가 가고 없을 때 할머니가 고구마 껍질을 일일이 다 벗기고 무쇠 가마솥에 폭폭 쪄서 몇 번씩 건조기 여닫으면서 말리는 작업을 하셨을 생각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하며 손 위에서 추워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잘 말라비틀어진 고구마말랭이를 하나 입안에 넣어 굴리고 꼭꼭 씹어주며 이놈의 고구마가 올해는 왜 이리 쫀쫀하게 이도 안 들어가게 말랐는지 하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하니 불현듯 조금은 아주 조금은 서러워지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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